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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습관-한국은 새로움, 영국은 오래됨을 입는다

by 양수경

“ZARA와 Barbour 사이, 나는 어디에 설까”


나는 시각적인 사람이다.

생각이 복잡할 때면 길을 걷는다.

누군가는 술을 마시고, 누군가는 친구를 만나지만,

나는 마트의 진열대 사이를 천천히 거닌다.


물건을 사려는 게 아니다.

색과 질감이 가지런히 놓인 그 세계 안에서

나는 잠시 ‘정돈된 마음’을 빌려 쓴다.

생각으로 하루를 다 써버린 날이면

그곳의 질서와 색감이 묘하게 위로가 된다.

머릿속이 아닌, 눈으로 쉬는 시간이다.




한국 – 빠른 유행의 즐거움


한국의 쇼핑 문화는 언제나 나를 놀라게 한다.

특히 패션의 속도.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입은 옷차림은

순식간에 오래된 사진 속 장면처럼 느껴진다.


거리마다 계절보다 먼저 바뀌는 옷,

스타가 입은 재킷이 다음 날 이미 매진된 매장.

패션은 개성이자 동시에 ‘소속감’의 표식이다.

조금만 다르면 튀는 것 같아 불안하고,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비슷함’ 안에서 안심을 찾는다.


빠름은 한국의 생존 리듬이자 에너지다.

K-팝, K-드라마, K-패션.

새로움은 곧 즐거움이고,

그 속도를 따라가는 것이 하나의 ‘생활 감각’이 되었다.




영국 – 오래 쓰는 전통 브랜드


반면 영국은 다르다.

이곳의 거리는 한결 느리게 흐른다.

Barbour, Burberry, Dr. Martens, Clarks.

세대를 넘어 사랑받아온 이름들이 여전히 거리를 지킨다.


처음 바버 재킷을 봤을 때, 세련돼 보이지 않았다.

왁스 냄새가 배어 있고, 색감도 투박했다.


하지만 비 오는 날 거리를 걷다가 그 재킷을 입은

나이 든 남성을 본 순간, 마음이 바뀌었다.

옷이 아니라 ‘시간’을 입은 사람이었다.

‘한 번 사면 오래 입는다’는 말이

그제야 ‘신뢰’라는 단어로 다가왔다.


영국의 거리를 걷다 보면,

구두 수선집과 옷 수선 가게가 문을 지키고 있다.

새 코트를 사기보다, 20년 된 바버 재킷을 고쳐 입는 풍경이 낯설지 않다.

이곳에서 쇼핑은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시간의 축적이며,

“우리 집은 늘 이 브랜드를 쓴다”는 말은 전통이 된다.




오래됨이 품격이 되는 이유


영국은 오래된 것을 ‘가치’로 여긴다.

집과 가구, 의복, 심지어 차 브랜드까지

대대로 이어지는 문화 속에서 ‘오래 쓴다’는 건

검소함이 아니라 품격이었다


한 번은 골동품 시장에서 60년 된 찻잔을 본 적이 있다.

미세한 균열이 있었지만, 상인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건 흠이 아니라 세월의 무늬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곳 사람들은 낡음 속에서 완성을 본다는 것을.


산업혁명 이후 “Made in Britain”은

값싼 대량 생산보다 ‘견고함’을 의미했다.

그 견고함의 습관은 지금도

영국의 거리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다.


영국의 브랜드는 단순한 패션이 아니라,

시간이 증명한 신뢰의 이름이다.


물론 그 전통이 언제나 평탄한 것은 아니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문을 닫은 오래된 이름들도 있다.

한때 런던 거리를 수놓았던 트렌치코트 브랜드

‘아쿠아스큐텀(Aquascutum)’처럼.


하지만 흥미로운 건, 사람들은 그런 이름을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래된 간판이 사라져도, 그 정신은 다른 형태로 이어진다.

누군가는 복고풍 디자인으로 다시 꺼내고,

누군가는 낡은 재킷을 고쳐 입으며 기억을 잇는다.


오래됨은 과거에 머무는 일이 아니라,

지속을 위한 ‘다른 방식의 변화’를 택하는 일이다.

영국의 전통은 그렇게 형태를 바꾸며 살아남는다.




변하는 영국, 공존하는 두 리듬


물론 영국도 변하고 있다.

젊은 세대들은 ZARA나 H&M, Uniqlo를 즐긴다.

런던의 옥스퍼드 스트리트에선

전통 브랜드 매장 옆으로 패스트 패션이 나란히 선다.


그럼에도 한쪽에는 여전히

수선집의 불빛이 남아 있다.

빠름과 느림, 새로움과 오래됨이

한 도시 안에서 자연스럽게 공존한다.

영국의 시간은 언제나 두 리듬으로 흐른다.



나의 고백


결국 쇼핑은 물건을 고르는 일이 아니라

‘시간을 대하는 태도’를 고르는 일이다.


한국은 순간의 설렘을,

영국은 지속의 위로를 입는다.

나는 그 사이에서 종종 멈춰 선다.


빠른 변화 속의 반짝임도 좋지만,

오래된 옷이 주는 안정과 부드러움은

나이가 들수록 더 고마워진다.


몸에 익은 옷은 무겁지 않고,

불편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나를 부드럽게 감싸 준다.


새로움은 마음을 깨우고,

오래됨은 마음을 덮어준다.

나는 그 두 온도 사이에서 오늘도 천천히 입는다.

나답게, 지금의 계절에 어울리게.



여러분은 어떤 리듬으로 살아가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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