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는 말 뒤에 숨은 감정의 거리”
영국에 처음 왔을 때, 가장 자주 들은 말은 “I’m sorry.”였다.
버스에서 어깨가 스쳤을 때,
길을 비켜줄 때,
심지어 상대가 나를 부딪쳤을 때조차 그들은 말했다.
그 말은 사과가 아니라, 관계를 부드럽게 이어주는 윤활유 같았다.
‘미안함’이 아니라 ‘배려’의 언어였다.
몇 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앞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그 문이 내 코앞에서 ‘탁’ 하고 닫혔다.
그 순간, 설명하기 어려운 당혹감이 밀려왔다.
30년 가까이 외국에서 살아서일까,
그 낯선 공기가 오래 남았다.
영국에서는 문을 잡아주는 것이 거의 반사적인 예의였으니까.
그때 깨달았다.
예의란 도덕의 절대 기준이 아니라,
각 문화가 만들어낸 감정의 거리의 표현이라는 것을.
영국의 감정문화는 죄책감(guilt)의 구조 위에 세워져 있다.
그 시작은 16세기 종교개혁이었다.
신 앞에서 인간은 더 이상 함께 고백하지 않았다.
각자의 양심이 스스로를 재판하기 시작한 것이다.
로마 가톨릭의 ‘공동 고백’이 사라지고,
죄는 공동체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도덕적 책임이 되었다.
신앙은 ‘회개’보다 ‘성찰’의 언어로 바뀌었고,
감정의 중심은 외부의 시선이 아니라 내면의 양심으로 이동했다.
그래서 잘못은 행동의 문제이고, 행동은 책임으로 해결된다.
“틀렸다면 바로잡으면 된다.”
그런 단호함이 관계의 질서를 만든다.
보리스 존슨 전 총리가 코로나 팬데믹 동안 파티를 열었다가
여론의 질타를 받았을 때, 그는 결국 “I take responsibility.”라며 사임했다.
그 사건은 영국 사회의 도덕 감수성을 보여준다.
비난의 초점은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
“그가 규칙을 어겼다”였다.
죄는 도덕의 문제이자, 신뢰의 영역인 것이다.
그 장면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이 나라에서 ‘도덕’은 감정이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라는 것을.
누군가의 잘못을 판단하는 기준은 감정적 비난이 아니라
그가 신뢰를 지켰는가, 책임을 졌는가이다.
이성의 언어로 감정을 조율하는 방식 — 그것이 영국식 도덕의 정서였다.
비슷한 이야기가 미국에서도 있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사생활 스캔들은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지만,
국민이 진짜 분노했던 건 외도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가 법정에서 위증(perjury), 즉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행동보다 진실과 신뢰의 파괴가 더 큰 도덕적 문제로 여겨졌던 것이다.
서구 사회는 개인의 사생활에 비교적 관대하지만,
법과 규칙을 어겼을 때는 매우 냉정하다.
사생활은 자유의 영역이지만, 규범을 어기는 순간 책임이 따라온다.
그들에게 도덕의 핵심은 ‘순결’이 아니라 ‘신뢰’다.
반면 한국 사회는 조금 다르다.
지도자의 사적인 삶이나 가족 문제에도 시선이 예민하다.
법보다 인격과 체면이 먼저 도덕의 기준이 된다.
그래서 사생활의 균열은 곧 신뢰의 붕괴로 여겨지고,
도덕적 결함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부끄러움으로 확장된다.
한국의 감정문화는 수치심(shame)의 구조 안에 있다.
그 뿌리는 오랜 유교적 전통 속에서 자라났다.
공자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사람의 근본이다(知恥近乎勇)”라 했다.
덕의 시작은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었고,
그래서 감정의 중심은 양심이 아니라 관계,
‘옳고 그름’보다 ‘어떻게 보이느냐’로 이동했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오래 몰랐다.
하지만 자라면서 그 ‘시선의 문화’를 몸으로 배웠다.
어렸을 때 내가 가장 자주 들었던 말이 있다.
“남에게 폐 끼치면 안 돼.”
“체면을 지켜야 해.”
그 말은 늘 올바름보다는 보임의 문제였다.
‘내가 잘못했나?’보다 ‘남들이 뭐라고 생각할까?’를 먼저 걱정하게 했다.
죄책은 법의 문제지만, 수치는 관계의 문제였다.
그래서 “미안하다”는 말속에는
‘내가 틀렸다’보다 ‘내가 민망하게 했다’는 감정이 더 컸다.
이 정서는 가정에서도 뚜렷하다.
영국의 부모는 아이가 잘못하면 이렇게 말한다.
“You made a bad choice.” — 행동에 초점을 둔다.
그리고 덧붙인다. “다음엔 어떻게 할까?”
문제는 행동으로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하지만 내가 자라온 한국의 집에서는 조금 달랐다.
“엄마가 창피하다.”
그 말은 훈계보다 훨씬 깊이 마음에 남았다.
잘못의 초점이 ‘행동’이 아니라 ‘존재’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아이의 실수는 곧 가족의 체면이 되었고,
그 순간 나는 ‘죄책감’보다 ‘부끄러움’을 배웠다.
그래서 한국의 가정에서 수치심은
지금도 가장 익숙한 감정의 언어로 남아 있다.
죄책은 사람 사이의 거리를 조정하지만,
수치는 그 거리를 모호하게 만든다.
죄책은 “잘못했으니 다시 시작하자”를 허락하지만,
수치는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번지기도 한다.
그래서 영국의 관계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깔끔하게 끝나지만,
한국의 관계는 밀착되었다가 멀어지는 감정의 진폭이 크다.
그 두 감정 사이에서 나는 자주 멈춰 선다.
어느 쪽이 옳은가 보다,
어떻게 더 따뜻할 수 있을까를 묻는다.
죄책은 도덕의 언어이고,
수치는 관계의 언어이다.
전자는 나를 성찰하게 하고,
후자는 나를 조심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둘 다, 결국 인간을 더 부드럽게 다듬는다.
때로는 죄책이 냉정의 벽을 만들고,
수치가 마음의 문을 닫게 하기도 하지만,
그 둘이 만나면 새로운 힘이 생긴다.
책임을 지되,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
정의와 공감이 함께 있는 감정의 자리.
“I’m sorry”와 “미안해요”는 달라도
그 말이 전하고자 하는 진심은 같다.
“당신을 소중히 여긴다.”
그 마음이 있을 때, 도덕도 체면도
결국 같은 길로 향한다 —인간다운 품위라는 길로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언어로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을까?
죄책의 언어일까, 수치의 언어일까 —
아니면, 사랑과 존중의 언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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