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의 도로 예절로 본 사회적 거리두기 문화
(Watching the English – Kate Fox 읽고)
침묵으로 이루어진 질서
런던의 좁은 도로를 달리다 보면, 운전대 너머로 묘한 질서감이 느껴진다.
누군가가 옆 차선을 양보하면, 상대는 손가락 하나를 살짝 들어 올리며 ‘고맙습니다’를 대신한다.
빵빵거리는 경적 소리 대신, 잠시 머뭇거리는 눈빛과 미세한 손짓이 오간다.
그건 감정이 아니라 언어 없는 예의다.
사회학자 케이트 폭스는 『Watching the English』에서 이렇게 말한다.
“영국인의 예의는 따뜻함의 표현이 아니라, 거리의 미학이다.”
그들에게 공손함은 친근함의 표시가 아니라,
서로의 사생활을 침범하지 않기 위한 기술적 장치에 가깝다.
한국의 도로, 질서보다 생존
나는 서른 살까지 한국에서 살았다.
명절이 되면 시골로 향하는 고속도로는 늘 꽉 막혀 있었다.
차들이 꼬리를 물고 서 있고, 저 멀리서부터는 ‘갓길(비상도로)’로 몰래 빠져나가 끼어드는
차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그 장면은 나에게 도로 위의 작은 전쟁처럼 보였다.
누군가가 얌전히 줄을 서 있으면, 뒤에서 끼어드는 차가 이득을 본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은 ‘예의’보다 ‘생존’을 선택한다.
그건 한국 사회의 속도감, 경쟁, 그리고
“나만 손해 보지 말자”는 무의식이 만든 풍경이었다.
영국의 운전 예절, 불편함의 미학
영국에서는 다르다.
도로가 좁고 차선이 많지 않아도, 사람들은 이상할 정도로 순서를 지킨다.
끼어드는 일은 거의 없고, 대신 서로 눈을 맞추며 양보의 신호를 주고받는다.
마치 도로 위에서도 ‘사회적 거리두기’가 작동하는 듯하다.
이건 단순한 운전 습관이 아니라, 타인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문화적 본능이다.
한국의 도로, 감정의 언어
영국의 도로에는 ‘미안합니다(sorry)’를 표현할 손짓이 없다.
그래서 영국 운전자들은 늘 약간의 불편함 속에 산다.
실수로 누군가의 차선을 막으면, 창문 너머로 미안함을 전하고 싶지만
그 대신 미세하게 깜빡이는 라이트나, 짧게 손을 들어 올리는 동작으로 대신한다.
그건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불편함의 완화 기술이다.
흥미로운 건 이 예의가 ‘공정성(fair play)’과 긴밀히 얽혀 있다는 점이다.
줄 서기에서 새치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영국인처럼,
운전 중 끼어들기 역시 ‘도덕적 위반’으로 여겨진다.
그렇다고 창문을 내리고 소리를 지르는 일은 거의 없다.
대신, 그들의 무기는 무표정한 인내다 —
가볍게 눈썹을 찡그리거나, 속으로 짧게 중얼거리고,
“저런 인간도 있지…” 하며 분노를 품은 채 조용히 운전대를 잡는다.
한국의 도로 풍경은 조금 다르다.
운전자는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상대가 내 차선을 끼어들면, 경적을 짧게 울리거나 라이트를 번쩍이며
“조심하세요” 혹은 “지나가세요”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양보받으면 비상등을 두 번 켜며 ‘감사합니다’를 표현하고,
억울하거나 위험한 상황에서는 클락션으로 즉각 감정을 드러낸다.
영국의 침묵이 ‘질서의 언어’라면,
한국의 경적과 불빛은 관계의 언어다.
하나는 감정을 절제해 질서를 세우고,
다른 하나는 감정을 나눠 관계를 세운다.
거리의 미학이 만들어진 이유
그렇다면 왜 영국인은 이렇게까지 ‘거리’를 중시하게 되었을까?
이건 단순한 성격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가 만든 결과다.
영국은 오래전부터 섬나라로 살아왔다.
육지로 연결된 대륙 국가들과 달리, 바다로 둘러싸인 환경은
자연스레 ‘나의 영역을 지키는 감각’을 키웠다.
좁은 땅에서 각자의 공간을 지키며 살아온 경험이,
지금의 “먼저 가세요”, “죄송하지만…” 같은 미세한 거리감으로 이어진 것이다.
게다가 영국은 오랜 세월 계급 사회였다.
귀족과 평민이 한 공간에 있으면서도 서로의 영역을 넘지 않으려는 예절이 발달했다.
말투, 몸짓, 심지어 시선의 높낮이까지 신분을 드러냈다.
그래서 너무 가까운 태도는 무례, 적당한 간격은 품격이 되었다.
여기에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더해졌다.
종교개혁 이후, 영국 사회는 감정보다 절제와 자기 통제를 미덕으로 여겼다.
겉으로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안으로 삼키는 것이 성숙함의 표시였다.
‘침착함(calm)’은 그들에게 예의이자 믿음의 표현이었다.
이 문화적 뿌리가 오늘날에도 이어져,
감정을 절제하고 공공장소에서 침묵과 배려로 표현하는 습관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것이다.
정(情)과 예의, 관계의 두 언어
한국은 집단 중심의 관계 문화, 즉 positive politeness 사회다.
가까움, 정(情), 공감이 관계의 기본이다.
한국에서 ‘가깝다’는 건 단순히 자주 보는 사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 사람의 집 구조를 알고, 냉장고에 뭐가 들어 있는지,
수저 젓가락이 몇 개 있는지까지 아는 것 —
그게 진짜 ‘친하다’는 의미다.
서로의 일상을 속속들이 알고, 때로는 “너무 잘 아는 척”을 하면서 서로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 정(情)의 방식이다.
예전에는 이런 친밀함이 관계의 기본예절이었다.
요즘 세대는 사적인 경계를 조금 더 존중하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는 관심을 표현하는 말로
“무슨 일 하세요?”, “아이들은 학교 어디 다녀요?”같은 질문이 오간다.
이건 무례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연결을 시도하는 방식이다.
상대의 삶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는 마음, 그게 한국식 ‘가까움’의 언어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이런 질문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프라이버시’라는 경계선을 두르고 산다.
가까워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한 번 신뢰가 형성되면 그 거리 안에서 깊고 안정된 관계가 만들어진다.
결국 한국은 정(情)을 통해 거리를 좁히는 문화라면,
영국은 예의(politeness)를 통해 거리를 유지하는 문화다.
한국에서는 “가까워야 편한 관계”라면,
영국에서는 “거리가 있어야 편한 관계”가 된다.
미안함의 기술, 불편함의 미학
이런 문화 속에서 ‘미안합니다’는 가장 자주 쓰이는 단어가 된다.
폭스의 조사에 따르면, 영국인은 하루 평균 여덟 번 이상 “Sorry”를 말한다.
문이 스칠 때, 줄을 설 때, 심지어 본인이 잘못하지 않았을 때조차 말한다.
“죄송하지만…”으로 시작하는 대화는, 단순한 사과가 아니라 관계의 안전장치다.
나도 종종 그런 장면을 겪는다.
길을 걷다 어깨가 살짝 부딪쳤을 때, 분명 내 잘못이었는데
상대가 먼저 “Sorry”라고 말한다.
순간 멈칫한다 — ‘아니, 내가 잘못했는데 왜 당신이 미안하다고 하지?’
그건 죄책감이 아니라, 긴장을 누그러뜨리는 사회적 윤활유다.
폭스는 이런 현상을 직접 조사했다.
응답자의 약 70%가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을 때에도 sorry를 말한 적이 있다”라고 답했다.
영국식 사과는 책임의 표현이 아니라, 공간의 완충 장치인 셈이다.
거리로 표현되는 존중
어쩌면 영국의 예의란, 따뜻함보다는 불편함의 미학이다.
서로의 침묵을 존중하고, 지나친 감정의 노출을 피하며,
조심스러운 손짓 하나로 인간관계의 질서를 유지한다.
거리 두기는 그들에게 냉담함이 아니라 존중의 다른 표현이다.
그래서일까.
영국의 도로는, 침묵 속에서 움직이는 거대한 대화 같다.
서로 부딪히지 않기 위해 눈빛을 조정하고,
작은 미소로 “먼저 가세요”를 건네는 그들의 방식은, 결국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나는 당신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너무 가까이 오지는 마세요.”
어쩌면 우리도 그런 거리감이 필요할지 모른다.
가까움과 존중, 온기와 절제 사이에서
우리는 오늘도 누군가와의 ‘적정 거리’를 배우고 있다.
당신은 지금, 어떤 거리를 두고 있나요?
#영국인의 예의 #문화비교#케이트폭스#WatchingTheEnglish#브런치에세이
#문화심리#영국생활기#침묵의 예의#정과예의#런던일상#존중의 거리
#사유의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