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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맥락 사회와 저맥락 사회 – 같은 말을 다른 언어로

한국은 분위기로, 영국은 문장으로 소통한다

by 양수경

영국 회사에서 처음 피드백을 받던 날이었다.

상사는 보고서를 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I’m not happy with this.”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화난 건가? 내가 무슨 실수를 했지?

말끝이 차갑지도 않은데, 묘하게 무서웠다.

감정의 여지를 남기는 말처럼 들렸으니까.


며칠 뒤, 동료가 웃으며 말했다.

“그거 그냥 ‘조금 고쳐달라’는 뜻이야. 전혀 화난 거 아냐.”


그제야 알았다.

영국에서 “I’m not happy with this.”는

감정이 아니라 업무의 표준 언어였다.

나를 탓하는 말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말이었다.


그 작은 오해가

두 문화의 문법을 새롭게 배우는 첫 순간이 되었다.




아주 짧은 에피소드 – “I’m afraid…”


영국에서 아이 학교 입학 지원을 할 때면,

부모들은 이 저맥락 문화를 한 번 더 배운다.


한국에서는 학교 입학 결과가 보통 ‘합격/불합격’으로 단순 공지되기 때문에

문장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신 기업이나 기관에서 거절을 전할 때는

“먼저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로 시작하는 완충 문장이 들어간다.

감정을 먼저 살피고 마음을 보호하는 방식이다.


영국은 조금 다르다.


“We are delighted…”면 합격,

*“I’m afraid…”면 불합격.


딱 첫 문장.

그 문장 하나에 모든 의미가 담겨 있다.


처음엔 차갑게 느껴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 방식의 배려를 이해하게 된다.

돌려 말지 않고, 불필요한 희망을 남기지 않고,

대신 필요한 정보를 먼저 건네주는 방식.

그 안에 조심스러운 예의가 숨어 있다는 것을.




그런데 왜, 이렇게 다르게 들릴까?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도 이런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똑같은 문장을 들었는데

왜 정반대의 언어처럼 느껴질까?


이 질문에 처음 답한 사람이 있다.

미국 인류학자 에드워드 T. 홀(Edward T. Hall).


1970년대, 미국 외교관들과 다국적 기업들은

아시아·중동과 협업할 때마다 같은 문제를 겪었다.


• 침묵의 의미가 다르고

• YES/NO의 결도 다르고

• 피드백 방식도 전혀 달라


협상은 어긋나고,

보고서는 오해로 돌아오고,

기업은 큰 비용을 치렀다.


그래서 홀은 물었다.

“문장은 같은데, 왜 마음은 이렇게 다른가?”


그는 외교·기업 사례를 하나하나 분석하며 결론 내렸다.


“문화마다 말이 작동하는 방식이 다르다.
그래서 같은 문장도 서로 다른 언어처럼 들린다.”


그가 만들어낸 개념이 바로

‘고맥락(high-context)’과 ‘저맥락(low-context)’이다.


· 고맥락(한국·아시아): 말보다 분위기·표정·관계의 온도

· 저맥락(영국·서구): 문장 그대로가 메시지


한쪽은 ‘읽는 대화’,

다른 한쪽은 ‘듣는 대화’를 한다.




이후, 이 개념은 어디로 확장되었을까?


홀의 이론은 연구실에서 끝나지 않았다.

국제 비즈니스, 조직 커뮤니케이션, 문화심리학으로 빠르게 퍼져나가며

지금은 “다른 문화와 일하기 위한 기본 언어”가 되었다.


오늘날 글로벌 기업들은

신입사원·관리자 교육에서 이 개념을 필수로 가르친다.

Google, P&G, HSBC, Deloitte 같은 곳에서도 마찬가지다.

협상, 이메일 문장 구조, 침묵의 의미까지

이 이론 없이는 설명할 수 없는 장면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국제학교와 영국 공교육 역시

이 저맥락 커뮤니케이션을 기반으로 움직인다.

입학 오퍼 레터, 학생 평가, 부모 상담…

모두 문장을 중심으로 소통한다.


한국 기업들도 예외는 아니다.

해외 파트너와 협업하는 팀에서는

고맥락/저맥락의 차이가

성과와 오해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지금은

서구 직장인, 한국 직장인, 글로벌 팀 관리자,

해외 학교 학부모들까지

이 이론을 하나의 공용 언어(common language)처럼 사용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주 듣는 표현들은 어떤 뜻일까?


① “I’m fine.”


한국식 감정 번역기: 표정이 굳었는데… 진짜 fine 맞아?

영국식 해석: 정말 괜찮아요. 끝.


② “It might be difficult.”


한국식: ‘어려울 수도 있다’ → 아, 방법을 찾아보겠다는 말이구나?

영국식: 거의 불가능합니다.

(부드럽지만 내용은 아주 선명한 No.)


③ “Are you okay?”


한국식: ‘괜찮으세요?’ → 큰 문제가 있을 때 묻는 말

영국식: 그냥 예의 있는 인사

(“오늘 좀 피곤해 보이네. 괜찮지?” 정도)




이 차이는 해외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다


고맥락·저맥락의 충돌은

해외에서만 벌어지는 문화 차이가 아니다.

집 안에서도, 부부 사이에서도 이미 존재한다.


아내는 말 뒤의 공기와 감정을 읽어주길 기대하고,

남편은 말한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그래서 같은 문장이 이렇게 흘러간다.


· 아내: “괜찮아.”

고맥락 의미: 괜찮지 않은데 먼저 알아주길 바람

· 남편: “아, 정말 괜찮구나.”

(저맥락 해석)


또는 —

· 아내: “이거 좀 정리해야 하지 않아?”

고맥락 의미: 당신이 치워줘.

· 남편: “정리 여부를 논의하자는 건가?”

(저맥락 의미)


한국 사회 안에서도

여성과 남성은 종종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처럼 살아간다.

글로벌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결국 내가 배운 것


고맥락 사회에서는

말 안에 숨어 있는 감정과 분위기를 읽어야 하고,


저맥락 사회에서는

문장 그 자체를 들어야 한다.


그래서

“I’m not happy with this.”는

나에게는 감정의 문장이었지만,

그들에게는 단지 수정 요청이었고,


“I’m afraid…”는

나에게는 불안의 시작이었지만,

그들에게는 가장 정중한 방식의 No였다.


같은 문장을 듣지만

우리는 서로 다른 언어 속에 있다.


이 차이를 알기 시작하자

오해는 줄고, 관계는 한결 가벼워졌다.

그리고 서로의 문장을 이해하는 일이

조금씩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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