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Gap Year가 내게 보여준 것들
한국에서 대학을 향한 강
한국에서 대학을 향한 길목에는 하나의 강이 놓여 있다.
그 강을 언제, 어떻게 건너느냐에 따라
아이들의 10대는 전혀 다른 얼굴을 갖게 되는 것 같다.
12월 초, 수능 성적표가 발표되는 날이면
부모의 숨소리부터 학생들의 손끝까지 공기가 달라진다.
성적표 한 장이 삶의 방향을 정해주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고등학교 3년은 입시라는 이름의 긴 터널이 된다.
특히 마지막 1년은
그 터널의 입구가 갑자기 좋아지는 것처럼
모든 압박이 한 지점에 모인다.
그 터널을 달리느라
우리는 가끔 멈추는 법을 잊어버린다.
이 풍경은 한국 사회가 걸어온 역사와도 맞닿아 있다.
전쟁 이후 ‘교육은 생존 전략’이었고,
고도성장기 동안 ‘대학 = 안정된 삶’이라는 공식이 거의 당연하게 굳어졌다.
대학 진학률이 70%가 넘는 구조는
국가 경쟁력과 산업 발전에 실제로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도
부정하기 어렵다.
우리가 모두 알고, 어느 정도는 받아들여 온 현실이다.
그 길 위에서 잃어버리는 것들
하지만 그 강을 건너는 동안
보이지 않게 놓치게 되는 것들도 있다.
한국의 선발 시스템은 너무 강력하다.
입시는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커리큘럼을 장악하고,
고등학생이 겪는 거의 모든 경험은
대학 지원서를 위한 스펙과 점수로 압축된다.
그 과정에서
10대가 원래 배워야 할 것들—
· 삶을 살아가는 기술,
· 호기심을 따라가 보려는 충동,
· 잠시 틀려보고, 실수해 보고, 넘어져보는 경험—
이런 것들이 종종 입시의 그늘 속에 묻혀 버린다.
“틀리면 안 된다”는 말은
한국 교육의 보이지 않는 문장처럼 따라다닌다.
하지만, 우리는 다 알고 있다.
아이들은 틀려봐야 배우고,
넘어져봐야 방향을 다시 찾으며,
실수해야 새로운 시도를 할 용기가 생긴다는 것을.
정답을 맞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된 교실에서
질문은 어떻게 자라날까.
의심은 어디에 머물 수 있을까.
자기만의 판단 기준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
그 물음들이 나를 한국과 영국 사이에서
조용히 생각하게 했다.
영국이 아이들에게 건네는 1년
영국에서는 전체 18세 청년 중 35~40%만이 대학으로 간다.
대학은 모두가 반드시 지나야 하는 ‘정해진 길’이 아니라
여러 갈래 중 하나일 뿐이다.
직업학교, 인턴십, 도제 프로그램, 바로 취업으로 이어지는 길 등이
너무 자연스럽게 함께 놓여 있다.
그런 영국에는 Gap Year라는 제도가 있다.
대학 입학 허가를 받아놓고 1년을 쉬기도 하고,
아예 UCAS(영국 대학 통합 지원 시스템) 지원 자체를
Gap Year 이후로 미루기도 한다.
이 시간은 말 그대로 ‘Gap’, 여백이다.
그 여백 속에서 아이들은
· 커피숍이나 슈퍼마켓에서 일하며 돈을 모으고
· 아프리카나 인도, 혹은 가까운 유럽의 도시들로 떠난다.
· 누구의 기준에도 묶이지 않은 시간 속에서
세상을 배우고, 자기 자신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조용히 묻는다.
“나는 어떤 길을 가고 싶은가”
여백이 다른 방향을 열어주는 순간들
흥미롭게도,
이렇게 1년을 쉬어가는 아이들 중에는
다시 원래 계획한 대학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들도 있다.
연구에 따르면 Gap Year를 가진 학생 중
약 3분의 1 정도가 1년 뒤 다른 길을 선택한다고 한다.
그 숫자를 나는 ‘포기’로 읽지 않는다.
오히려 그 1년이 그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 증거처럼 느껴진다.
어떤 아이들은 쉬는 1년 동안
‘공부’보다 먼저 ‘삶’을 만나버린다.
아르바이트로 마주한 사람들,
낯선 도시에서 혼자 서본 순간들,
스스로 번 돈으로 떠난 여행에서 만난 감정들.
그 경험들이 조용히 속삭인다.
“꼭 대학이어야만 할까?”
“내가 가려던 길이 정말 내 길이었을까?”
또 어떤 아이들은
멈춤의 시간 속에서 자신의 리듬을 처음으로 자각한다.
쉬는 동안 달라진 속도가
다시 예전의 학업 속도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을 때도 있다.
나는 그 선택을
흔들림이라기보다 ‘깨달음’으로 읽는다.
쉬어보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목소리,
멈추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방향이 있는 것처럼—.
이 1년의 여백은
그들에게 ‘다른 방향’을 선물한다.
그리고 어쩌면,
그 방향은 처음에 그리던 것보다
더 자기 다운 길일지 모른다.
정답의 시대를 지나, 질문의 시대로
그러나 지금 세계는
더 빠르게 변하고 있다.
AI가 지식을 기억하고,
암기를 인간보다 훨씬 더 잘하며,
복잡한 계산과 추론도 실수 없이 처리하는 시대.
정답이 있는 문제는
더 이상 인간이 먼저 해결할 필요가 없는 시대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남은 경쟁력은 무엇인가?
정답을 찾는 능력이 아니라
정답이 없는 문제를 다루는 능력.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이 아니라
문제를 정의하는 힘.
이미 가능한 것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판단하는 윤리적 감각.
그리고
· 경험을 연결하고,
· 맥락을 읽고,
· 사람들과 소통하며,
· 복잡하고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자기만의 판단 기준을 세우는 능력.
이런 능력들은
정답 중심 교육이 길러낼 수 없는 영역이다.
틀릴 수 있고,
의심해 볼 수 있고,
잠시 멈춰서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는 환경에서만
자라나는 것들이다.
삶을 통해 배우는 시간
모든 교육의 바탕에는
삶을 직접 경험해 보는 시간이 있다.
책상 위의 배움이 방향을 알려준다면
길 위의 배움은 그 방향이 나의 것인지 묻는다.
경험 없는 지식은 현실에 닿지 못하고,
지식 없는 경험은 금세 흩어진다.
그러나 둘이 만나는 순간
사람은 비로소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보기 시작한다.
재수의 1년이든,
Gap Year의 1년이든
결국 그 시간들이 던지는 질문은 같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리고 그 길을 진짜로 원하는가?
멈춤이라는 용기
멈춘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멈추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은 계속 달려갈 것만 같고,
속도가 한 번 떨어지면
다시 예전처럼 달려갈 힘이 나오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
조용히 멈춰 선 그 자리에 서 있으면,
내 마음 깊은 곳의 소리가 들려올지도 모른다.
그 소리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다를까 봐,
그 다름을 인정해야 할까 봐
우리는 멈춤을 자꾸 미룬다.
하지만 가끔은
멈추는 용기가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진다.
삶의 속도를 늦춰야만 보이는 것들,
잠시 내려놓아야만 들리는 것들이 있다.
만약 지금 당신에게
딱 1년의 여백이 주어진다면—
그 여백에 무엇을 놓고 싶은가.
무엇을 배우고 싶은가.
그리고 어떤 사람으로 다시 돌아오고 싶은가.
그 질문 앞에서
우리 각자의 진짜 배움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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