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나라의 보이지 않는 층위
영국에서 처음 장을 보러 갔던 날,
나를 가장 먼저 멈춰 세운 건
날씨도, 억양도, 마트의 규모도 아니었다.
바로 Waitrose의 한 비스킷 진열대였다.
그 칸에는
비스킷이, 정말로…
사방으로 깔려 있었다.
버터 쇼트브레드만 여러 종류,
오트 비스킷은 식감별로 나뉘고,
초콜릿 코팅은 다크·밀크·오렌지 향까지.
나는 그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마치 비스킷들이 묻는 듯했다.
“오늘은 어떤 취향의 세계에서 살아보고 싶나요?”
더 재미있는 건,
그 옆의 요구르트 칸은 지나치게 단출하다는 사실이다.
영국 슈퍼마켓에서 요구르트는
기본적인 몇 가지면 충분하다.
반면 한국에서는 요구르트가 계급처럼 분화된다
한국에 가면 이 진열의 논리가 완전히 뒤집힌다.
요구르트는
마시는 것, 떠먹는 것, 고단백 그릭,
어린이용, 유산균 강화형…
종류가 한 줄 끝까지 이어지고,
신제품은 늘 쏟아진다.
한국의 요구르트 진열대는
단순한 식품 코너가 아니라
기능·효율·속도의 세계관이 펼쳐진 곳이다.
한국은 새로움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유동성이 크고 이동의 속도가 빠른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득 깨닫게 된다
“작은 진열대는 그 사회를 가장 먼저 닮는다.”
사람들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어떤 기준으로 서로를 읽는지,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며 경쟁하는지—
그 모든 것은
정치나 뉴스보다 먼저 진열대에 나타난다.
진열대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말해준다.
단순한 선택의 목록이 아니라
그 사회가 무엇을 ‘계급화’하는지를 보여주는 풍경이다.
영국: “슈퍼마켓은 계급의 언어다”
영국에서 조금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이곳에서는 어디서 장을 보는가가
그 사람의 생활방식과 취향, 교육 수준,
그리고 동네의 분위기를 거의 그대로 드러낸다.
· Waitrose = 중상류층, 윤리·로컬 소비
· M&S Food = 프리미엄 취향
· Tesco & Sainsbury’s = 가장 넓은 중간층
· Aldi & Lidl = 가성비, 실용적 라이프스타일
· Iceland = 저가·냉동 중심
“너 Waitrose 다녀?”
이 짧은 질문에는
그 사람의 작은 세계가 이미 스며 있다.
영국은 오래전부터 문화적 계급 사회였다.
돈보다 오래된 것이
말투, 교육, 취향, 스포츠, 동네의 역사다.
그래서 계급은
“나 어디서 장 본다” 같은
사소한 선택 속에 숨어 있다.
계급은 높고 견고하지만
그 벽이 거의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오히려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
→ “너는 너, 나는 나.”
→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 산다.”
상향 경쟁이 거의 없기 때문에
비교도 적고, 피로도 적다.
한국: 계급은 ‘소비로 이동하는 세계’
반면 한국에서는
슈퍼마켓에 계급이 없다.
대형마트는 품질이 비슷하고,
편의점은 생활 플랫폼이고,
온라인 배송은 효율의 문제다.
한국에서 계급을 결정하는 것은
제품이 아니라 소비 구조다.
· 명품
· 아파트
· 자동차
· 직업·교육
· 패션
· SNS 이미지
한국에서는 계급이
사회적 신호(signaling)로 읽힌다.
· “그 아파트면 중상층이네.”
· “대기업이면 upper-middle.”
· “명품 소비는 upward mobility 욕구.”
계급 이동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경쟁은 늘 존재하고,
비교는 일상의 배경음처럼 따라붙는다.
→ “멈추면 뒤처진다”는 압박
→ “소비로 나를 증명해야 한다”는 피로
이 구조는 한국만의 강점이지만
동시에 가장 큰 그림자이기도 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다
“계급이란, 사회가 나를 어디에 두느냐가 만든 보이지 않는 층위.”
경제적 조건만으로 정해지지 않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기회·취향·관계가
겹겹이 쌓여 만들어지는 복합적 위치.
그리고 중요한 건—
계급은 나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가 나를 어디에 두느냐로 더 선명해진다.
영국에서는 계급을 말투와 취향으로 읽고
한국에서는 계급을 소비로 읽는다.
둘은 다르지만, 둘 다 분명한 구조다.
영국의 계급 유지 — 유익성과 그림자
영국은 계급이 거의 보이지 않지만
정교하게 작동한다.
✔ 유익한 점
· 사회적 안정과 예측 가능성
· 정체성과 전통의 유지
· 상층부의 도덕적 기대
· 문화적 다양성의 층위 제공
✖ 문제점
· 불평등의 재생산
· 낮은 계층 이동성
· 외국인·이민자의 배제
· 개인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규범
나는 이 구조 역시
영국이 언젠가 넘어야 할 벽이라고 생각한다.
전통의 품위가 누군가에게는 장벽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소비 기반 계급 구조 — 속도와 압박의 그림자
한국의 계급은 변동성이 크고 경쟁적이다.
✔ 유익한 점
· 이동 가능성
· 성취의 보상
· 빠른 혁신과 적응력
✖ 문제점
· 멈추면 뒤처지는 압박
· 이미지 소비 중심의 피로감
· 과소비 구조의 강화
· 끊임없는 비교와 경쟁
한국의 속도는 눈부시지만
그 속도가 사람을 소진시키기 시작하면
그 구조를 다시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 두 진열대 사이에 서 있다
영국의 비스킷은 ‘취향의 계급’을 말하고
한국의 요구르트는 ‘기능의 계급’을 말한다.
영국은
생활 방식의 전통이 계급을 만들고,
한국은
자본과 속도가 계급을 움직인다.
나는 그 두 진열대 사이에서
두 사회의 다름을 동시에 읽는다.
각각이 가진 고유한 질서와 아름다움을 보면서도
어떤 계급에도 완전히 동화되지 않는다.
국적은 하나지만
내 시선은 두 나라의 경계를 분주히 오가며
나만의 자리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그 경계의 자리가
지금의 나에게 아주 잘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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