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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차이를 이해한다는 것, 결국 사람을 읽는 일

영국과 한국, 그리고 세대의 틈에서

by 양수경

해외에서 산 지 30년.

내가 나고 자란 익숙한 토양을 떠나 산다는 것은,

낯선 바람 속에서 나 자신을 다시 세워가는 과정이었다.


문화가 달라지자

내 감정이 끓어오르는 온도도, 타인에게 반응하는 회로도 달라졌다.

시간이 흐르며

세상을 해석하는 눈, 삶의 우선순위,

그리고 내가 굳게 믿어온 가치관의 뿌리마저 조용히 궤도를 틀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럽고도

찬란한 과제는 평생을 서구 문화권에서 숨 쉬며 자란 아이,

겉모습은 한국인이지만 내면은 완벽한 영국인인

내 아들을 이해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한 지붕 아래 밥을 먹고 잠을 자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중력을 가진 두 개의 우주였다.




서로 다른 중력, 서로 다른 세계


그 차이는 일상의 가장 사소한 틈에서 불쑥 고개를 든다.


한국 엄마들에게 방학(Half Term)이

부족한 공부를 채우고 학원 스케줄을 재조정하는 '전략의 시간'이라면,

이곳 엄마들에게 방학은

아이들과 훌쩍 떠나는 '낭만의 시간'이다.


정치인의 사생활은 이곳에서 가십일지언정

치명적 흠결은 되지 않는다.

투표소에서 누구를 찍었는지 묻는 건

밥상머리 예절만큼이나 무례한 침범으로 여겨진다.


거리의 연인들이 똑같은 옷을 입는 '커플룩' 또한

영국 친구들의 눈에는 기이한 풍경이다.

그들에게 사랑은 '우리'라는 이름으로 동질화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취향이 선명하게 살아있는 두 개인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결정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매일 아침 "Lovely day!"라며 환하게 웃어주던 상냥한 이웃이,

규정을 어긴 다른 이웃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카운슬(구청)에 신고하는 모습이었다.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저 정도 일도 신고를 해야 하나?'

웃음 뒤에 숨겨진 그 낯선 차가움에 마음이 움찔했다.


'아는 사이'라면 웬만한 허물은 정(情)으로 덮어주는 것이

미덕이라 믿어온 나에게,

그 장면은 단순한 신고가 아니라 일종의 배신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들의 삶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을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들의 신고는 야박함이 아니라

'원칙을 지킴으로써 공동체를 보호한다'는

그들만의 가치관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관찰은 성급한 판단을 멈추는 일이고,

이해는 내 마음의 온도를 그들의 온도에 맞추는 일이라는 것을.


이해는 단순한 지적 행위가 아니다.

이해는 감정의 질감을 부드럽게 바꾸는 일이다.

"왜 저래?"라는 비난이

"왜 그럴까?"라는 질문으로 바뀌는 순간,

“아, 그럴 수 있겠구나.”라는 여유가 생기며

얼어붙어 있던 오해는 비로소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세대의 벽을 넘어


아들과의 관계 또한

끊임없는 통역이 필요한 시간이었다.

서로 다른 세대의 언어를 배우는 일이었고,

어쩌면 가장 지루하면서 가장 사랑스러운 여정이었다.


나에게 공부는

성실함과 인내의 증명이었지만,

아들에게 공부는 "재능이 있으면 하는” 선택에 가까웠다.


내게 걱정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었지만

아들에게는 불필요한 간섭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같은 말을 해도

각자가 딛고 선 배경—문화, 세대, 경험—이 다르면

그 말은 전혀 다른 감정으로 전달된다.




문화, 보이지 않는 지층(Strata)


나는 자주 스스로에게 묻는다.


"도대체 문화를 이해한다는 건 무엇일까?

왜 우리는 이토록 쉽게 서로를 오해할까?"


학자들의 정의는 다양하지만,

내가 몸으로 깨달은 문화란 결국

'배경(Background)'이자 '지층(Stata)'이었다.

겉으로 보이지 않지만,

한 사람의 감정과 행동을 규정하는 깊은 뿌리.


우리는 타인을 볼 때

대부분 수면 위로 드러난 '표면'만을 본다.

인사하는 법, 말투, 표정, 식사 습관 같은 것들.


처음 해외에 왔을 때,

한국 사람들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영국 사람들은 손을 내밀거나 포옹했다.

그 작은 제스처 하나만으로도

나는 ‘다른 세계’를 실감했다


그러나 관계가 깊어질수록

우리는 더 깊은 심해로 내려가야 한다.

무엇을 옳다고 믿는지,

삶에서 무엇을 참을 수 없고 무엇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지.

가치관과 의식 구조라는 단단한 지층을 들여다볼 때,

비로소 '이해'라는 꽃이 핀다.




다름은 벽이 아니라 통로다


문화적 차이 앞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은 '불편함'

혹은 '차가움'이다.


그러나 그 불편함은 경고가 아니라 신호다.

내가 모르는 세계가

조용히 내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신호.


"왜 저래?"라며 문을 닫아버리면

우리는 영영 타인이 되지만,

"당신은 왜 그렇게 느끼나요?"라고 묻는 순간

그 틈새로 호기심이라는 볕이 든다.


사춘기 아들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나는 기꺼이 배우가 되기로 했다.


"와, 정말? 그래서 어떻게 됐어?"


내게는 어색한 연극 같았던 그 추임새가

아들에게는 자신의 우주가 받아들여지는

환대의 경험이었다.


어느 날, 아들이 학교에서의 무용담을

신나게 털어놓던 순간, 나는 알았다.

문화 차이를 극복하는 기술은

지식이 아니라 태도라는 것을.


나의 기준으로 너를 고치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너를 바라보겠다는

다정한 항복.




문화는 고정된 명사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동사다


문화 연구자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은 말했다.


"문화는 고정된 명사가 아니라,
서로 다른 세계가 부딪히며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동사다."


나는 영국과 한국 사이,

부모와 자식 사이의 경계 위에서

그 말이 얼마나 정확한지

매일 배워가고 있다.


낯선 문화를 받아들인다는 건

단순히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세계를 넓히는 일이다.


어떤 것은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내려놓고,

어떤 것은 새롭게 선택하며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넓은 사람이 되어간다.


문화 차이라는 단어 앞에서

나는 이제 두려움 대신 설렘을 느낀다.




다름은 벽이 아니라, 서로를 다시 배우는 통로다


우리가 조금 더 천천히 관찰하고,

조금 더 깊이 듣고,

조금 더 넓게 품을 수 있다면.


이해는 더디게 올지라도,

한 번 깃든 그 온기는

아주 오래오래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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