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가 쉬는 방식에 대하여
영국에 온 첫해,
크리스마스 아침, 급하게 살 것이 있어
차를 몰고 동네 중심가인 하이스트리트(High Street)로 나갔다.
도로는 거의 텅 비어 있었다.
상가가 밀집한 거리였지만,
문을 연 가게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제야 알았다.
오늘은 ‘문을 여는 날’이 아니라는 걸.
친구가 한인 마트로 가 보라고 했다.
다행히 급한 물건은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상하게도 마음 한쪽이 조용해졌다.
크리스마스와 새해 같은 날,
이 나라에서는 거의 모든 가게가 문을 닫는다.
버스도 없고, 전철도 뜸하다.
도시 전체가 잠시 멈춘 것처럼 보였다.
광고도 멈춰 있었고,
사람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나는 왜
당연히 열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한국에서는 이맘때면 늘 약속이 있었다.
크리스마스라기보다 연말 분위기에 가까웠다.
송년 모임과 회식,
크리스마스 당일에도 쇼핑을 하러 다녔다.
연말은 쉬는 시간이기보다
마감해야 할 일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부서별 회식, 업무와 연결된 모임들,
그리고 그 사이에 끼워 넣은
나를 위한 보상처럼 쇼핑이 있었다.
겨우 쉬는 하루 이틀마저
무언가를 배우고 채워
성과로 남겨야만,
비로소 ‘잘 보냈다’고 안도했던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영국의 크리스마스는
‘잘 보내는 날’이 아니라
‘그냥 멈춰도 되는 날’처럼 느껴졌다.
왜 어떤 도시는 크리스마스에 멈추고
어떤 도시는 더 환해질까?
그 ‘멈춤’은 분위기만이 아니라,
제도이기도 하다.
영국(잉글랜드·웨일스)에서는 2004년 제정된 법으로
크리스마스 당일 대형 상점의 영업이 제한된다.
그날만큼은,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쌓여 만들어진 결정이었다고 한다.
물론 완전히 멈추는 건 아니다.
공항 안 작은 상점이나 주유소 편의점,
몇몇 지역의 작은 가게들,
크리스마스 축제처럼 꾸려진 마켓은
불빛을 유지한다.
불 꺼진 쇼윈도가 길게 늘어선 거리의 적막과,
드문드문 켜진 작은 노점의 주황색 불빛 사이.
텅 빈 도로 위로 내려앉은 차가운 고요와
그 틈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사람들의 낮은 웃음소리.
그 낯선 대비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배웠다.
‘편리함’과 ‘쉼’이,
어쩌면 서로 다른 편일 수도 있다는 것을.
요즘 한국에서도
휴일을 두고 비슷한 말들이 오간다.
쉬어야 한다는 목소리와,
그날 일하면 더 벌 수 있으니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말이
나란히 놓인다.
휴식은 권리라는 주장과,
수당이 붙는 노동은 선택이라는 현실이
같은 자리에 서 있다.
그래서 어떤 휴일은
쉬는 날이기보다
계산하는 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오늘을 비우는 게 나은지,
조금 더 채우는 게 합리적인지.
한국에서는 휴일에도
도시가 꽤 잘 돌아간다.
필요하면 누군가는 일해야 하고,
그게 이상하지 않다.
때로는 “수당이 나오니까 괜찮다”는
현실적인 합의도 있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리듬,
휴일을 대하는 태도,
도시가 쉬는 방식의 차이다.
나는 그해 크리스마스 아침,
문 닫힌 하이스트리트 앞에서
‘낭비처럼 보이는 시간’이
꼭 낭비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걸
그해 크리스마스 아침에 처음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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