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안 하기’를 배우는 중입니다

낭비가 아니라, 나를 채우는 기술

by 양수경


영국에 산 지 20년이 다 되어가지만, ‘Doing nothing(아무것도 안 하기)’이 낭비가 아니라 하루를 다시 채우는 기술일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내가 사는 집은 영국에서 가장 크다고 알려진 리치먼드 공원 근처다. 날이 좋은 날 공원을 가로지르다 보면, 차창 밖으로 기이한 풍경이 펼쳐진다. 사람들이 마치 집단 시체 놀이라도 하듯 잔디밭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것이다. 팔다리를 대자로 뻗고 입을 벌린 채 하늘만 보는 사람들. 그들의 얼굴엔 ‘할 일’이나 ‘목적’ 같은 건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 평온한 풍경을 보면서도 내 마음 한구석은 늘 불편했다. 나는 쉬는 날에도 영어 단어를 외우거나, 밀린 빨래라도 ‘해치워야’ 비로소 오늘 하루를 ‘썼다’는 안도감을 느끼는 한국인이었으니까.


어릴 적 우리는 학교 급훈이나 교과서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배웠다. “시간은 금이다.” 그 문장은 내 안에서 금보다 더 무거운 채무가 되었다. 1분 1초도 허투루 쓰면 안 된다는 강박,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곧 도태이자 죄악이라는 메시지는 한때 거의 ‘국룰’’에 가까웠다.


중고등학교 시절, 선생님들은 농담처럼 말했다. “너희가 지금 한 시간 더 공부하면 미래의 남편 얼굴이 바뀐다.” 우리는 그 말에 깔깔 웃으면서도 문제집을 폈다. 지금 같았으면 “그 얼굴은 제 취향이라서요”라고 한마디 했을 텐데, 그때의 나는 그 말을 세상의 불문율처럼 받아들였다.


그래서일까. 성인이 되어서도 “오늘 뭐 했어?”라는 질문 앞에서 나는 늘 ‘설명’부터 준비하게 된다. “그냥 집에 있었어”로는 왠지 부족해서, “책장 정리를 좀 했고”, “오랜만에 요리도 했어”라며 굳이 생산적인 꼬리표를 갖다 붙인다. 나의 휴식은 늘 누군가에게 납득되어야 할 변호문 같았다.


하지만 영국에서의 ‘Doing nothing’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우리 집은 세미 디태치드(Semi-detached, 두 집이 붙어 있는 형태) 하우스라 낮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집 정원이 훤히 보인다. 옆집 찰스 할아버지는 날만 좋으면 정원 의자에 나와 앉는다. 책을 읽는 것도, 휴대폰을 보는 것도 아니다. 그저 멍하니 앉아 햇살이 마당을 가로질러 갈 때까지 가만히 있는다. 그 모습엔 이상하게도 설명해야 할 구석이 없다.


영국의 이런 태도는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의 소설 **《오만과 편견》**에 나오는 인물들을 떠올리게 한다. 소설 속 젠트리(Gentry) 계급, 즉 신사들은 땀 흘려 일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노동은 하인의 몫이었고, 신사의 품격은 ‘시간을 온전히 소유하는 능력’에서 나왔다. 다아시(Darcy) 씨가 밭을 갈거나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었다면 그토록 매력적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산책하고, 차를 마시고,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은 게으름이 아니라, 자신이 삶의 주인이라는 ‘존재의 증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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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존재하기’의 정점에는 홍차(Tea)가 있다. 영국인에게 티타임은 단순히 목을 축이는 시간이 아니다. 펄펄 끓는 물을 붓고 찻잎이 우러나기를 기다리는 그 3분, 찻잔의 온기를 손바닥으로 느끼며 후루룩 들이키는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소란을 잠시 꺼두는 의식(Ritual)이다. 바쁜 업무 중에도 “Cupla tea?”(차 한잔할래?)라는 말은 마법의 주문처럼 흐르던 시간을 멈추고 쉼표를 찍는다.


미국의 청교도 정신이 “신을 위해 쉴 새 없이 생산하라”라고 외칠 때, 영국은 “열심히 하되, 너무 유난 떨지는 마(Keep calm and carry on)”라며 한 발짝 물러서 있었다. 어쩌면 영국의 ‘Doing nothing’은 시끄러운 산업사회에 대한 그들만의 우아한 저항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월요일 아침, 옆집 이웃인 마거릿과 마주쳤을 때의 일이다. “주말 잘 보냈어? 뭐 했니?” 내가 묻자 마거릿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I did nothing.” (아무것도 안 했어.) 나는 한국식 리액션으로 “아, 좀 지루했겠네?”라고 되물을 뻔했다. 하지만 그녀가 덧붙인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And it was lovely.” (그래서 정말 좋았어.)


그 말속에는 변명도, 죄책감도 없었다. 아무것도 안 했기에 완벽했다니. 그 당당한 여유가 부러워, 나도 어느 날 큰맘 먹고 따라 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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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도 책도 없이 빈손으로 정원 긴 의자에 누웠다. 파라솔 아래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가만히 있는 게 노동보다 힘들 줄이야. ‘이래도 되나?’, ‘저녁엔 뭐 해 먹지?’, ‘아까 온 이메일 답장은 했던가?’ 몸은 누워 있는데 머릿속은 런던 시내보다 복잡했다. 누가 봐도 한가로운 풍경 속에서 나 혼자 내면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억지로 눈을 뜨고 하늘을 보았다. 파라솔 끄트머리 너머로 회백색 구름이 아주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마치 눈 덮인 산이 소리 없이 자리를 옮기는 것처럼, 혹은 거대한 섬들이 느릿하게 이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아래를 나는 새들조차 출근길 회사원처럼 분주해 보이지는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왜 서둘러야 하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날갯짓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정원 끝에 서 있는 커다란 떡갈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흔들렸지만, 나무는 그 자리에 깊게 뿌리박은 채 미동도 없었다. 마치 미술관 벽에 걸린 컨스터블(John Constable)의 거대한 풍경화 속 배경처럼, 나무는 묵묵히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나무는 무엇을 ‘하는(Doing)’ 게 아니라, 그저 그곳에 ‘있는(Being)’ 것만으로도 정원을 완성하고 있었다.


그 순간, 햇살과 구름과 나무의 정적이 내 소란스러운 마음 안으로 밀물처럼 들어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텅 비어 있던 마음이 조용히 차오르는 기분.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아, 어쩌면 이건 낭비가 아니구나. 휴대폰 배터리를 충전하듯, 나라는 사람에게도 전원을 끄고 가만히 두는 시간이 필요했던 거구나.


창밖엔 여전히 런던 특유의 빗방울이 듣는다. 나는 이제 죄책감 없이 찻잔을 들고 창밖을 멍하니 바라본다. 누군가 지금 뭐 하냐고 묻는다면, 이제는 웃으며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것도 안 해. 그래서 아주 근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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