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창피해하던 그날의 깨달음"
아들이 아직 어렸을 때였다.
영국의 한 교육기관에서 나는 담당자에게 거듭 부탁을 했다.
“조금만 더 도와주세요. 이건 정말 중요한 일이에요.”
그때 아들이 내 팔을 잡았다.
“엄마, 그렇게 하면 안 돼.”
그 말속에는 낯선 감정이 섞여 있었다.
창피함, 그리고 경계.
순간, 나도 얼굴이 뜨거워졌다.
아들의 눈빛 속에서
내가 낯선 사람으로 비치고 있음을 느꼈다.
내가 옳다고 믿던 방식이
이곳에서는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묘한 부끄러움과 당혹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나는 그저 진심이었는데,
그 순간, 나는 낯선 나라의 문 앞에 서 있었다.
한국에서 나는
“하면 된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안 되면 되게 하라,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라.
그건 생존의 언어였고, 믿음의 방식이었다.
전쟁과 가난을 지나온 세대는
노력으로 모든 걸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의지와 열정이 곧 사람의 힘이었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는
간곡히 부탁하면 회사나 기관이
가끔은 ‘룰’을 조금 비껴가며 편의를 봐주었다.
특히 서비스업에서는
적극적으로 구하고 설득하는 것이
능력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사람 사이의 정(情)이
규정보다 앞설 때가 많았다.
그건 공동체를 지탱하던 오래된 방식이었다.
서로의 처지를 헤아리고,
‘원칙’보다 ‘상황’을 우선하는 문화.
가까운 관계 안에서
정과 체면, 신뢰가 동시에 작동했다.
그래서 부탁은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서로의 인간됨을 확인하는 의식이었다.
그 정이 있기에
모난 사회도 돌아가고,
때로는 불합리마저 덮였다.
하지만 영국은 달랐다.
이곳은 "룰"이 있는 사회다.
룰을 지키는 것은 예의이고,
그 경계를 넘는 건 무례가 된다.
한국에서 정성은 설득의 언어지만,
이곳에서 정성은 조용히 지켜보는 일이다.
움직임보다 침묵이 더 신뢰를 준다.
영국 사람들의 눈에는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 애쓰는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건 불가능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질서에 대한 간섭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이 두 문화는 서로 다르다.
한국의 “하면 된다”는
의지와 연대의 에너지다.
그 덕분에 우리는
위기를 이겨내고 서로를 도왔다.
그러나 그 말은 때로
무리한 자기 소모와 번아웃으로 이어진다.
‘안 되면 네 탓’이라는 압박이
성실함을 죄책감으로 바꾸기도 했다.
반대로, 영국의 ‘룰 중심’ 문화는
예측 가능하고 공정하다.
누구나 같은 절차로 보호받는다.
하지만 그 속엔 융통성의 부재와
감정의 거리감이 있다.
도와주지 않는 친절함,
품위 속의 냉정이 가끔 마음을 시리게 한다.
이제야 조금 알겠다.
한국의 ‘하면 된다’는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힘이었고,
영국의 ‘룰을 지켜라’는
나를 멈추게 한 지혜였다.
성장은 한쪽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두 리듬 사이의 균형을 배우는 일이다.
그날,
아들이 창피해하던 그날,
나는 처음으로
내 안의 ‘하면 된다’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마음속에
다른 문장을 새겼다.
때면 되게 하라.
기다림의 때와 실행의 때를
분별하는 지혜를 배우며.
당신은 언제, ‘하면 된다’를 내려놓고 멈춰본 적이 있나요?
#영국과 한국사이에서 #문화의 온도 #하면 된다 #룰을 지켜라 #때면 되게 하라 #사유에세이 #브런치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