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앞에서는 경제학도 소용없더라
또다시 이별이 찾아왔다.
불과 몇 달 전 독일로 이주했던 친구의 이름이, 아침 단톡방에서 다시 반짝였다. 이번에는 한국 발령이었다. 독일은 비행기로 두 시간이면 닿는 곳이라 마음이 덜 불안했는데, 한국은 '몇 년'이 될지 모르는 시간으로 멀어졌다.
아침부터 단톡방이 분주했다. 어디서 만나면 좋을지 의논하느라 메시지가 쉴 새 없이 쌓였다. 브런치를 위한 최적의 장소를 찾는 것, 이건 내게 일종의 '골치 아픈 미션'이다. 나는 평소엔 아무 곳이나 괜찮은 편이지만, 친구들이 결정을 미루는 순간 내 안의 '전공 본능'이 깨어난다.
어느 정도냐 하면, 나는 커피 머신에서 에스프레소가 추출되는 그 30초가 아까워 기어이 싱크대를 잡고 스쿼트 20개를 해치우는 사람이다. 시간의 가성비(Cost-effectiveness)를 따지는 건 내게 숨 쉬는 것과 같다. 순간 머릿속 지도 앱은 수학 문제가 되었다. 넷이서 가장 쉽게 오갈 수 있는 장소. 경제학 전공자답게 나는 순간적으로 계산을 시작했다. A의 집에서 40분, B집에서 35분, 내 집에서 20분. 각자의 위치가 달라 공평하게 좋은 위치를 찾는 것은 고등학교 때 인수분해보다 까다로웠다.
나는 지도 위에 가상의 선을 긋고, 세 사람의 동선이 교차하는 최적의 중간 지점(Mid-point)을 찍었다. '킹스턴 막스 & 스펜서 근처 카페' 효율성으로만 따지면 이곳이 정답이었다. 주차 편하고, 역 가깝고, 커피값싸고, 경제적으로 완벽한 균형점.
하지만 내 손가락은 자꾸만 지도 구석, 전철역도 없는 낯선 언덕길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럼, 리치먼드 공원 안쪽에 있는 '펨브르크 로지' 어때?"
누군가 물었다.
"거긴 우리 집에서 가려면 1시간 이상 걸려."
"차 없으면 가기 힘들잖아."
평소라면 나도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고작 커피 한 잔 마시자고 차가 없는 M을 픽업해서 왕복 두 시간을 쓰는 건 비효율의 극치니까. 하지만 오늘은 '효율'보다 '공기'를 사기로 했다.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친구랑 마지막으로 만난 장소는, 편리함 보다 몇 년을 우리 안에 머물 '추억의 온도'로 남아야 했으니까.
아침부터 회색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나는 M을 가까운 전철역에서 픽업해서 리치먼드 공원 입구로 향했다. 잠시 창문을 열자 비 냄새가 섞인 런던의 차가운 공기가 선명하게 밀려왔다.
12월과 1월 내내 비가 왔다. 비 오는 날이 '뉴 노멀(New normal)'인 계절을 지나고 있다. 봄여름이면 제집 안방인 양 널브러져 있던 사슴들도 다들 어디론가 숨었는지 공원은 고요했다. 나무들도 겨울을 품고 침묵하고 있었다.
펨브르크 로지에 가까워질 즈음, 구름이 잠깐 갈라졌다. 뒤편에서 해가 살짝 고개를 내밀자, 잘 다듬어진 관목 위에 얹혀 있던 서리가 반짝이다가 물방울로 천천히 풀리고 있었다. 입구의 하얀 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밤비가 남긴 물기 때문에 유리처럼 반짝였고, 우리는 그 위를 조심스레 디뎠다.
현관 앞 하얀 기둥들이 어깨를 펴고 서 있었고, 그 위에는 오래된 담쟁이가 가지를 뻗고 있었다. 겨울이라 잎은 비워둔 채 뼈대만 남은 덩굴이 벽을 타고 느리게 흘러내렸다. 그래도 완전히 비어 보이지 않았다. 덩굴 사이로 마른 잎 몇 장이 아직 남아, 겨울의 회색 속에 뜻밖의 부드러움을 얹어주고 있었다.
우리는 잠시 로지 옆으로 난 작은 오솔길을 걸었다. 봄여름이면 머리 위로 쏟아질 듯 붉고 흰 장미들이 가득 덮였을 나무 터널(Pergola)은, 지금 앙상한 뼈대만 드러낸 채 차가운 하늘을 이고 서 있었다. 그 텅 빈 정원 너머로, 저 멀리 두툼한 갈대지붕(Thatched roof)을 얹은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볕이 좋은 날에는 동화 속 오두막처럼 포근해 보였을 텐데, 잎을 다 떨군 나무들 사이에 덩그러니 놓인 그 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외로워 보였다. 마치 화려했던 한 시절을 다 떠나보내고, 이제는 떠나는 이의 뒷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고 서 있는 누군가의 쓸쓸한 등처럼.
자리에 앉아 스콘과 티, 커피를 마주했다. 반으로 갈라진 스콘 옆에 클로티드 크림과 잼이 작은 그릇에 담겨 있었다. 크림은 생크림처럼 가볍지 않고, 버터처럼 단단하지도 않은- 묵직하게 흰색이었다. 영국의 겨울 같은 맛.
재미있는 것은 영국에서는 이런 자리에서 가끔, 쓸데없이 진지한 농담이 시작된다는 점이다. 잼을 먼저 바르느냐, 크림을 먼저 올리느냐 같은 것.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도 잠깐 순서를 고민했다.
"근데....... 이거 순서가 있잖아. 데번(Devon)식이야. 콘월(Cornwall)식이야?"
"잼 먼저냐, 크림 먼저냐. 왜 영국 사람들은 이런 걸로도 지역 자존심을 걸까?"
방금 전까지 지도 앱으로 중간값을 찾던 내가, 이번엔 스콘 위에 올릴 정체성을 고민하고 있었다. 고(姑) 엘리자베스 여왕은 '잼 먼저'파였다고 하던데, 사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우리는 평소라면 1분 만에 끝났을 이 시시한 논쟁을 10분이나 끌고 있었다.
잼을 한 번 더 뜨고, 크림을 다시 한번 올리고, 누군가는 스푼을 괜히 접시에 톡톡 두드렸다. 잼이 먼저든 크림이 먼저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 대화가 끊기면, 테이블 아래 떨어져 있는 '이별'이라는 단어를 누군가 주워 올릴 것만 같아서. 우리는 필사적으로 스콘 이야기만 파고들었다.
"오늘은..... 그냥 많이 바르는 게 정답이야."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자, 우리 넷이 동시에 웃었다. 정말 사소한데, 이상하게 마음이 풀리는 웃음이었다. 나는 결국 둘 다 넉넉히 올렸다. 그리고 스콘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스콘이 모래알처럼 퍽퍽했다. 입안의 수분을 다 빨아들이는 밀가루 덩어리가 목구멍에 걸려 잘 넘어가지 않았다. 따뜻한 홍차를 들이켜도 가슴 어딘가에 얹힌 묵직한 덩어리는 내려가지 않았다. '몇 년'이라는 시간은, 그렇게 삼키기 힘든 것이었다.
"근데.... 한국 들어가면, 언제 또 보게 될까?"
누군가가 툭, 질문을 던졌다. 질문은 늘 공중에서 태어나니까. 친구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너도 알잖아. 나 초등학교 때 여기 왔어. 머리만 검지, 생각하는 건 그냥 영국인이잖아."
"........."
"사람들은 내가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겠지? 근데 나한테는...... 런던이 고향이고 한국이 외국이야. 내가 거기서 잘 섞일 수 있을지......**겉모습만**한국인인 이방인이 될까 봐, 그게 제일 겁나"
우리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에게 한국행은 '귀향'이 아니라, 또 다른 '이민'이었다. 독일은 두 시간이면 닿는 거리였는데, 한국은 거리보다 마음의 시차가 더 멀게 느껴졌다.
"그래도.... 우리 꼭 또 보자."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날은 약속보다 지금을 더 오래 붙잡고 싶었다. 다시 만날 때를 품고 사진을 찍었다. 우리 몇 년 후 이 자리에서, 이 모습 그대로 다시 넷이서 찍자고. 허공을 치는 약속이라도 붙들지 않으면 힘들 것 같아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혼자 생각했다.
사실 M을 위해 내가 선택했어야 할 최적의 장소는 '윔블던 힐(Wimbledon Hill)'이었다. M의 집이 윔블던에 있으니까. 그냥 그녀의 집 앞에 주차하고, 가볍게 걸어서 언덕 위 카페에 가면 그만이었다. 기름값도 안 들고, 운전할 수고도 없고, 시간도 절약되는 완벽한 코스. 경제학적으로는 그게 정답이었다.
하지만 집 근처는 너무 일상이었다. 이삿짐 상자와 해야 할 일들이 그대로 남아 있을 동네를, 떠나는 친구에게 마지막 풍경으로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오늘 핸들을 꺾어 일부러 20분을 더 달렸다. 내비게이션은 늘 가장 빠른 길을 알려주지만, 마음이 원하는 길은 대게 조금 멀었다.
우리는 가끔, 그런 거리를 산다. 커피값이 아니라 시간과 공기와 우회를.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비효율적인 풍경'이 가장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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