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nter Lights를 보러가다

생일은 핑계고, 우리는 빛을 보러 간다

by 양수경


오후 세 시, 대충 일을 접고 전철에 올랐다. 겨울을 지나는 런던은 세 시에도 이미 해가 뉘엿하다. 덜컹거리는 기차 안, 정거장마다 누군가는 내리고 누군가는 올라탄다. 도시의 하루가 사람들의 어깨를 바꿔 끼우며 흘러간다.


차창 밖으로 묘지가 스쳐 지나갔다. 런던에는 도심 한가운데 묘지가 참 많다. 쓰러진 비석과 아직 곧게 선 비석, 그 앞에 놓인 시들지 않은 꽃들. 삶과 죽음이 이토록 무심하게 나란할 수 있다는 게 늘 낯설면서도 익숙하다. 문득, 오늘 만날 친구들이 내 삶에 머물러 온 방식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오래, 조용히, 그리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 옆에 있어 준 사람들.


오늘은 친구의 생일이다. 우리는 케이크를 자르는 대신, 카나리 워프의 ‘윈터 라이츠(Winter Lights)’를 보러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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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혼자 광장을 걸었다. 카나리 워프. 원래는 거친 부두였다가, 90년대 재개발로 런던의 ‘두 번째 금융 심장’이 된 동네. 예전의 이곳은 늘 조금 앙상했다. 높고 반듯한 유리 빌딩 사이로 칼바람이 불었고, 사람의 온기보다 자본의 기세가 더 강했다.


그런데 요즘은 공기가 달라졌다. 오피스만으로는 도시가 숨 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걸까. 상가와 레스토랑이 늘고, 문화가 섞이며 비로소 '살아 있는 동네'가 되었다. 휑하던 광장에는 이제 퇴근한 직장인들, 아이 손을 잡은 가족들, 그리고 휴대폰을 든 연인들이 꽉 차 있다.


유리 건물 사이로 바람이 휘돌아 나와 얼굴을 한 번 쓸고 지나가면, 도크(Dock) 위의 빛들이 물결에 부딪혀 두 번 살아났다. 이 동네의 빛은 늘 두 번 반짝인다. 한 번은 차가운 공기 위에서, 또 한 번은 흔들리는 물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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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이 도착했고, 우리는 빛을 따라가기 전 배부터 채우기로 했다. 예약을 하지 않았다. 생일이 거창해질수록 오히려 부담스럽다는 걸, 우리 나이는 이미 알고 있다. 선물을 따로 주고받기보다, 같이 걷고 같이 웃고, 하루를 한 장면으로 남기는 쪽을 택한다.


걷다가 우연히 투명한 다이닝 돔(Dining Dome)을 발견했다. 멀리 스키 리조트에서나 볼 법한 이글루 같은 구조물. 코비드 시절 ‘거리 두기’를 위해 도입됐다가, 이제는 이상하게도 ‘낭만’으로 살아남은 자리였다. 유리 한 겹을 사이에 두고 계절과 합의하는 기분. 밖은 입김이 나오는데, 안은 외투를 벗어도 괜찮을 만큼 아늑했다.


디저트가 나왔을 때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한입 크기의 작은 브라우니(Brownie) 접시에 셰프가 초콜릿 드리즐로 큼직하게 적어둔 글씨.


Happy Birthday.


숟가락 넷이 접시 가장자리에 얌전히 걸려 있고, 아이스크림은 브라우니 위에서 천천히 녹기 시작했다. 누군가 말했다.


“야, 이거 사진부터.”


생일 축하 노래보다 셔터 소리가 먼저 울렸다. 이상하게 그날은 케이크보다 그 글씨가 더 달콤했다. 나이가 들수록 생일은 거창한 이벤트가 아니라, 이렇게 사소한 장식 하나에 마음이 조금 환해지는 날이기도 하니까. 우리가 오늘 모인 이유를 접시가 먼저 말해 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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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빛을 찾아 나섰다. 카나리 워프의 'Winter Lights'는 친절하지 않다. 한 곳에 모여 있지 않고, 보물찾기 하듯 지도를 들고 표지판을 따라 여기저기 흩어진 작품을 찾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날은 길을 잃는 느낌도 나쁘지 않았다. 목적지에 빨리 닿는 게임이 아니라, 중간중간 멈춰 서는 연습 같았으니까.


엘리자베스 라인 역을 나오자마자 전시는 이미 시작돼 있었다. 수로 위로 길게 놓인 유리 조명들이 물가를 따라 피어 있었다. 조명이라기보다 밤의 정원에 솟아난 유리 갈대 같았다.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서 빛은 더 선명해지고, 물 위에 한 번 더 비치면서 두 겹이 되었다. 사람들은 일부러 속도를 늦췄다. “어디가 작품이지?” 하고 찾기 전에, 이미 발밑이 반짝이며 대답하고 있었다. 지나가며 볼 수 있게 만들어둔 길이라 더 좋았다. 일부러 ‘보러’ 가는 게 아니라, 걷는 사람의 하루에 조용히 끼어드는 불빛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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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우리를 붙잡은 건 바람개비였다. 정확히는 바람개비처럼 생긴 빛의 구조물. 음악의 박자에 맞춰 색이 돌고, 형태가 바뀌고, 다시 되돌아오는 작은 무대였다. 블루에서 화이트로, 다시 초록으로 넘어갈 때마다 공기까지 갈아입는 느낌이 났다.


“와, 예쁘다”보다 “계속 보고 싶다”가 먼저 나왔다.


바람개비는 바람이 있어야 돌고, 우리는 사람이 있어야 빛이 난다. 그 단순한 사실이 그 작품 앞에서 유난히 선명했다. 생일을 축하한다는 건, 결국 누군가의 시간을 잠깐 ‘리듬’으로 만들어주는 일인지도 몰랐다. 오늘 하루만큼은 시계 대신 빛이 박자를 치고, 우리는 그 박자에 맞춰 같이 웃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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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한가운데, 파란 몸체에서 휘어진 팔들이 사방으로 뻗은 작품이 있었다. 끝에는 둥근 빛들이 매달려 있었다. 정면을 향해 커다란 흰 원들이 떠 있어, 마치 누군가를 ‘관람’하는 쪽이 오히려 우리인 듯했다.


우리는 그 앞에서 잠깐 멈췄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이 먼저 나갔다.


손끝이 닿는 순간, 빛이 ‘핑’ 하고 색을 갈아입었다.


“야, 너는 지금 무슨 색 나와?”

“아니 왜 너만 예쁘게 바뀌어?”


우리는 서로의 손을 번갈아 보며 실험하듯 깔깔댔다. 조용히 감상하던 ‘우아한 어른’의 가면은 금세 벗겨졌다. 런던의 금융가 한복판에서, 우리는 잠시 나이를 잊은 아이들이 되었다. 생일은 그런 날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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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간을 따라 황금빛 선들이 줄지어 서 있는 작품도 있었다. 사람의 윤곽만 남긴 조각들. 표정은 없는데도 감정은 또렷했다. 각 조각의 얼굴 앞에는 작은 네모가 하나씩 떠 있었다. 휴대폰 화면 같기도, 명찰 같기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한 문장 같기도 한… 그 조그만 사각형 때문에, 몸은 자연스럽게 앞으로 조금씩 기울어졌다.


그날 이 조각들은 묘하게 연인들처럼 보였다. 가까이 있어도 완전히 닿지 못하고, 멀어져도 시선은 끊기지 않는 거리. 우리는 그 사이를 걸으며 “저 둘은 싸웠다 화해 중인 커플 같다” 같은 말을 주고받았고, 그 말들 때문에 작품이 더 살아났다.


그리고 뒤편에는 검은 물이 조용히 깔려 있었다. 물 위로 도시의 불빛이 흔들리며 번졌다. 금융의 동네 한복판에서, 숫자 대신 사람의 기울기를 보는 시간이 잠깐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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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가니, 이번엔 우유병들이 나타났다. 다 마시고 남은 플라스틱 병들이 격자처럼 쌓여 네모난 공간을 만들고 있었다. 전기가 색을 입히자, 쓰임이 끝난 것들이 갑자기 기억을 가진 재료가 됐다.


버려진 것들이 모이면 쓰레기장이 되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손을 만나면 예술이 된다. 그 네모난 방은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끝난 것들도, 다시 빛날 수 있다고. 낡은 것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는 거야."


어쩐지 그 문장이 지금 우리의 나이와 닮아 있었다. 뜨겁던 방식은 지났지만,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은근하게 빛을 내며 살아가는 중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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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까 스쳐 지나갔던 묘지가 다시 떠올랐다. 삶과 죽음이 나란한 도시. 오늘 밤은 그 나란함 사이에 우리가 잠시 끼어들었다 나온 기분이었다. 빛과 물과 바람 사이, 그 찰나의 틈으로.


현관문을 열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단톡방에 사진이 쏟아졌다. 물 위에서 두 번 살아난 조명들, 손끝에서 ‘핑’ 하고 바뀌던 색, 네 사람이 한 접시를 두고 웃던 순간들이 화면 속에서 다시 반짝였다.


사진들을 넘겨보다가 나는 깨달았다. 우리는 겨울밤에 ‘빛’을 보러 간 게 아니었다. 결국 서로의 얼굴이 환해지는 순간을 보러 간 거였다.


생일 축하해, 친구야. 덕분에 내 겨울도 잠시 환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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