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이 여행을 떠나는 이유(2)

우리 안에 '소녀'를 만나는 시간

by 양수경


집에서의 나는 늘 '교감 선생님'이다. 아이들에게는 "숙제했니?", "양말 뒤집어 놓지 마라" 잔소리를 늘어놓고, 소파와 한 몸이 된 남편을 보면 눈치부터 준다. 결혼 전에는 우아하고 부드러운 엄마가 되겠다고 다짐했건만, 현실의 나는 마트 영수증의 10원 단위까지 확인하고, 가족들 앞에서는 늘 효율과 절약을 강조하는 깐깐한 '관리자'가 되어 있다. 내 안의 낭만은 밀린 빨래와 설거지 더미 아래 깊숙이 묻혀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공항에 도착해 친구들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마법이 시작된다. "꺄악! 여전하네! 하나도 안 변했어!" 점잖던 내 목소리가 순식간에 한 옥타브 올라간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는 세비아 공항 한복판에서 팔짝팔짝 뛴다. 그 순간, 나는 누군가의 엄마도, 아내도 아니다. 우리는 순식간에 교복을 입고 낙엽만 굴러가도 까르르 웃던 그 시절의 단발머리 소녀들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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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여행은 유치해서 찬란하다. 집에서라면 절대 하지 않을 '비효율적인 짓'들이 여기선 추억이 된다. 구글맵을 켜놓고도 반대 방향으로 가서 다리가 퉁퉁 부었지만, 서로 짜증을 내기는커녕 "야, 우리 운동 부족인 거 어떻게 알고 이러냐?" 하며 길바닥에 주저앉아 배를 잡고 웃는다. 평소라면 돈 아깝다며 절대 사지 않을 촌스러운 선글라스를 서로 씌워주며 "완전 이태리 스타일인데?"라고 치켜세워준다. '효율'과 '격식' 따위는 개나 줘버린 이 완벽한 자유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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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2시, 좁은 에어비앤비(Airbnb) 침대 위에서 컵라면을 먹으며 우리는 '위험한 상상'을 시작한다. 안주는 "만약에" 놀이다. "야, 너 그때 도서관 자리에 쪽지 남겼던 그 공대 오빠 기억나? 그때 그 오빠랑 결혼했으면 어땠을까?" 친구의 눈이 풀리며 몽롱해진다. "말해 뭐 해. 지금쯤 실리콘밸리 사모님 돼서 캘리포니아 햇살 받으며 요가하고 있겠지. 내 인생에 고무장갑은 없었을 거야!" "웃기지 마, 그 오빠 지금 배 나오고 난리 났대." 깔깔거리며 웃지만, 사실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건 그 남자가 아니다.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었고, 어디로든 갈 수 있었던 그 시절의 '가능성'이다. 현실의 나는 '민진 엄마'라는 단단한 껍질 속에 살지만, 이 낯선 도시의 밤에서만큼은 첫사랑의 설렘을 기억하는 '여자'가 된다.


그때, 옷을 갈아입던 친구 유진(가명)의 등 뒤로 선명한 수술 자국이 보였다. 작년에 암 진단을 받고 큰 수술을 이겨낸 친구다. 수술 전만 해도 유진은 우리 중 가장 걱정이 많고 알뜰한 친구였다. "애들 학비 모아야지", "노후 준비해야지" 하며 정작 자신을 위해선 립스틱 하나도 벌벌 떨며 못 사던 그녀였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유진은 180도 달랐다. 비싼 스카프를 망설임 없이 결제하고, 다리가 아프면 "택시 타자! 내가 쏠게!" 하고 소리쳤다.


"유진아, 너 진짜 많이 변했다. 예전에는 100원 한 푼도 아끼더니." 나의 말에 유진이 라면 국물을 후루룩 마시며 담담하게 말했다.


"야, 내가 수술실 들어가면서 무슨 생각했는지 아냐? '아, 그때 그 원피스 그냥 사 입을걸.' 딱 그 생각나더라. 억울해서 미치겠는 거야."


잠시 정적이 흘렀다. "퇴원하고 나서 집에 가자마자 아끼던 그릇들 다 꺼냈어. 손님 오면 쓴다고 모셔뒀던 해런드 찻잔, 비싸서 못 입던 옷들... 이제는 내가 다 써. 내 인생에서 '나중'은 이제 없어. 지금 좋으면 그냥 하는 거야."


그 말을 듣는데, 며칠 전 오빠에게서 들려온 엄마의 요양원 입소 소식이 떠올랐다. 평생을 자식 위해 헌신하다가 이제야 당신의 시간이 생겼는데, 정작 그 시간을 기억조차 못 하고 요양원 침대에 누워 계신 엄마.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듯했던 허망함이 다시금 건드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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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샌드위치처럼 끼어 있다. 위로는 점점 희미해져 가는 부모님을 바라봐야 하고, 옆으로는 친구가 아프기 시작하는 나이. '이별'과 '죽음'이 남의 일이 아니라 내 방문 앞까지 와서 서성이는 나이. 그제야 알았다. 우리가 왜 이렇게 미친 듯이 웃고 떠드는지. 우리가 소환한 '소녀'는 단순히 철없던 시절의 내가 아니었다. 계산하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느라 현재를 유보하지 않고, 온몸으로 '지금'을 기뻐할 줄 알았던, 삶을 가장 삶답게 살았던 시절의 나였다. 유진은 지금 목숨을 걸고 그 소녀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날 밤, 우리는 서로의 얼굴에 팩을 붙여주며 약속했다. "우리, 너무 철들지 말자." "그래, 나중에 점잖은 할머니는 얼마든지 될 수 있잖아. 지금은 그냥 철없는 소녀로 살자."


여행 가방을 풀며 빨랫감을 분류한다. 다시 '엄마'의 시간, '관리자'의 시간으로 돌아왔다. 현실은 그대로다. 싱크대엔 설거지가 쌓여 있고, 남편은 여전히 소파와 한 몸이다. 하지만 내 마음은 달라졌다. 마음속에 언제든 꺼내 누를 수 있는 강력한 '웃음 버튼'을 하나 챙겨 왔기 때문이다. 현실이 팍팍해서 내 안의 소녀가 숨을 못 쉴 때, 나는 눈을 감고 세비아의 그 밤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짐을 쌀 것이다. 내 안의 그녀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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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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