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에 '소녀'를 만나는 시간
집에서의 나는 늘 '교감 선생님'이다. 아이들에게는 "숙제했니?", "양말 뒤집어 놓지 마라" 잔소리를 늘어놓고, 소파와 한 몸이 된 남편을 보면 눈치부터 준다. 결혼 전에는 우아하고 부드러운 엄마가 되겠다고 다짐했건만, 현실의 나는 마트 영수증의 10원 단위까지 확인하고, 가족들 앞에서는 늘 효율과 절약을 강조하는 깐깐한 '관리자'가 되어 있다. 내 안의 낭만은 밀린 빨래와 설거지 더미 아래 깊숙이 묻혀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공항에 도착해 친구들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마법이 시작된다. "꺄악! 여전하네! 하나도 안 변했어!" 점잖던 내 목소리가 순식간에 한 옥타브 올라간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는 세비아 공항 한복판에서 팔짝팔짝 뛴다. 그 순간, 나는 누군가의 엄마도, 아내도 아니다. 우리는 순식간에 교복을 입고 낙엽만 굴러가도 까르르 웃던 그 시절의 단발머리 소녀들로 돌아간다.
우리의 여행은 유치해서 찬란하다. 집에서라면 절대 하지 않을 '비효율적인 짓'들이 여기선 추억이 된다. 구글맵을 켜놓고도 반대 방향으로 가서 다리가 퉁퉁 부었지만, 서로 짜증을 내기는커녕 "야, 우리 운동 부족인 거 어떻게 알고 이러냐?" 하며 길바닥에 주저앉아 배를 잡고 웃는다. 평소라면 돈 아깝다며 절대 사지 않을 촌스러운 선글라스를 서로 씌워주며 "완전 이태리 스타일인데?"라고 치켜세워준다. '효율'과 '격식' 따위는 개나 줘버린 이 완벽한 자유로움.
밤 12시, 좁은 에어비앤비(Airbnb) 침대 위에서 컵라면을 먹으며 우리는 '위험한 상상'을 시작한다. 안주는 "만약에" 놀이다. "야, 너 그때 도서관 자리에 쪽지 남겼던 그 공대 오빠 기억나? 그때 그 오빠랑 결혼했으면 어땠을까?" 친구의 눈이 풀리며 몽롱해진다. "말해 뭐 해. 지금쯤 실리콘밸리 사모님 돼서 캘리포니아 햇살 받으며 요가하고 있겠지. 내 인생에 고무장갑은 없었을 거야!" "웃기지 마, 그 오빠 지금 배 나오고 난리 났대." 깔깔거리며 웃지만, 사실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건 그 남자가 아니다.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었고, 어디로든 갈 수 있었던 그 시절의 '가능성'이다. 현실의 나는 '민진 엄마'라는 단단한 껍질 속에 살지만, 이 낯선 도시의 밤에서만큼은 첫사랑의 설렘을 기억하는 '여자'가 된다.
그때, 옷을 갈아입던 친구 유진(가명)의 등 뒤로 선명한 수술 자국이 보였다. 작년에 암 진단을 받고 큰 수술을 이겨낸 친구다. 수술 전만 해도 유진은 우리 중 가장 걱정이 많고 알뜰한 친구였다. "애들 학비 모아야지", "노후 준비해야지" 하며 정작 자신을 위해선 립스틱 하나도 벌벌 떨며 못 사던 그녀였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유진은 180도 달랐다. 비싼 스카프를 망설임 없이 결제하고, 다리가 아프면 "택시 타자! 내가 쏠게!" 하고 소리쳤다.
"유진아, 너 진짜 많이 변했다. 예전에는 100원 한 푼도 아끼더니." 나의 말에 유진이 라면 국물을 후루룩 마시며 담담하게 말했다.
"야, 내가 수술실 들어가면서 무슨 생각했는지 아냐? '아, 그때 그 원피스 그냥 사 입을걸.' 딱 그 생각나더라. 억울해서 미치겠는 거야."
잠시 정적이 흘렀다. "퇴원하고 나서 집에 가자마자 아끼던 그릇들 다 꺼냈어. 손님 오면 쓴다고 모셔뒀던 해런드 찻잔, 비싸서 못 입던 옷들... 이제는 내가 다 써. 내 인생에서 '나중'은 이제 없어. 지금 좋으면 그냥 하는 거야."
그 말을 듣는데, 며칠 전 오빠에게서 들려온 엄마의 요양원 입소 소식이 떠올랐다. 평생을 자식 위해 헌신하다가 이제야 당신의 시간이 생겼는데, 정작 그 시간을 기억조차 못 하고 요양원 침대에 누워 계신 엄마.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듯했던 허망함이 다시금 건드려졌다.
우리는 샌드위치처럼 끼어 있다. 위로는 점점 희미해져 가는 부모님을 바라봐야 하고, 옆으로는 친구가 아프기 시작하는 나이. '이별'과 '죽음'이 남의 일이 아니라 내 방문 앞까지 와서 서성이는 나이. 그제야 알았다. 우리가 왜 이렇게 미친 듯이 웃고 떠드는지. 우리가 소환한 '소녀'는 단순히 철없던 시절의 내가 아니었다. 계산하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느라 현재를 유보하지 않고, 온몸으로 '지금'을 기뻐할 줄 알았던, 삶을 가장 삶답게 살았던 시절의 나였다. 유진은 지금 목숨을 걸고 그 소녀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날 밤, 우리는 서로의 얼굴에 팩을 붙여주며 약속했다. "우리, 너무 철들지 말자." "그래, 나중에 점잖은 할머니는 얼마든지 될 수 있잖아. 지금은 그냥 철없는 소녀로 살자."
여행 가방을 풀며 빨랫감을 분류한다. 다시 '엄마'의 시간, '관리자'의 시간으로 돌아왔다. 현실은 그대로다. 싱크대엔 설거지가 쌓여 있고, 남편은 여전히 소파와 한 몸이다. 하지만 내 마음은 달라졌다. 마음속에 언제든 꺼내 누를 수 있는 강력한 '웃음 버튼'을 하나 챙겨 왔기 때문이다. 현실이 팍팍해서 내 안의 소녀가 숨을 못 쉴 때, 나는 눈을 감고 세비아의 그 밤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짐을 쌀 것이다. 내 안의 그녀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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