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이라는 부엌을 떠나, 낭비라는 사치 속으로
엄마가 되고 나서 나의 여행은 늘 ‘미션 수행’ 같았다. 비행기 표가 얼마고 숙박비가 얼마인지, 여행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머릿속 계산기가 먼저 윙윙 돌아갔다. 주부의 여행법은 ‘본전 뽑기’의 저주에 걸려 있었다. 큰돈을 들여 떠나온 만큼 우리는 1분 1초도 허투루 써서는 안 되었다. 아이에게 교육적인 박물관을 보여줘야 했고, 실패 없는 맛집을 검색해야 했고, 남들이 다 찍는다는 랜드마크 앞에서 숙제하듯 ‘인증숏’을 남겨야 했다. 그래야만 이 막대한 소비가 ‘합리적인 지출’로 정당화될 수 있었으니까.
여행지에서조차 나는 유능한 살림꾼이어야 했다. 최단 거리 동선을 짜고, 입장료 할인을 챙기고, 가성비 좋은 메뉴를 고르는 일. 그것은 낯선 도시에서 수행하는 또 다른 형태의 ‘가사 노동’이었다. 몸은 파리에, 로마에 있었지만, 내 영혼은 여전히 ‘효율’이라는 이름의 부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런던에 살며, 나는 어느 날 문득 지도를 접어버리기로 했다. 유명한 대영 박물관도, 버킹엄 궁전의 근위병 교대식도 보러 가지 않기로 했다. 대신 나는 이름 모를 햄스테드 히스(Hampstead Heath) 언덕으로 향했다. 오래된 나무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구름이나 하염없이 바라보며 시간을 ‘죽이기’ 시작했다. 런던 시내의 바쁜 소음이 발아래로 까마득하게 멀어지고, 젖은 흙냄새와 차가운 바람만이 내 곁에 머물렀다.
누군가 물었다. “거기까지 가서 왜 그러고 있어? 아깝지 않아?” 예전 같으면 뜨끔했을 그 말이, 이제는 전혀 아프지 않았다. 나는 대답 대신 속으로 웃었다.
“아니, 나는 지금 내 인생에서 가장 비싼 사치를 부리는 중이야.”
생각해 보면 그렇다.
러너(Runner)들은 살을 빼기 위해 뛰지 않는다. 그들은 심장이 터질 듯한 그 살아있는 감각, 바람이 뺨을 스치는 그 순간의 희열 때문에 운동화 끈을 묶는다. 아기는 어딘가로 이동하기 위해 걸음마를 떼지 않는다. 대지를 두 발로 딛고 서는 그 경이로움, 그 자체가 목적일 뿐이다.
나의 여행도 그래야 했다. 무언가를 보러 가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사러 가는 것. ‘엄마’라는 역할, ‘아내’라는 직함, ‘가성비’라는 강박을 떼어놓고, 오직 나라는 사람의 두 발로 낯선 땅을 밟아보는 것. 그것은 낭비가 아니라, 내 영혼에 산소를 공급하는 가장 시급한 ‘구호 활동’이었다.
마트에서 장을 볼 때, 나는 철저히 ‘Need(필요)’의 세계에 산다. 두부가 필요하고, 우유가 필요하고, 세제가 필요하다. 내 장바구니는 가족의 생존을 위한 품목들로 채워진다. 거기엔 ‘나’의 취향이 끼어들 틈이 없다. 하지만 여행은 철저히 ‘Want(원함)’의 세계여야 한다. 다리가 아픈데도 굳이 저 언덕 위에 올라가 보고 싶은 마음. 유명한 맛집 대신 골목길의 허름한 카페에 앉아 맛없는 커피를 마시고 싶은 기분. 아무런 효용 가치가 없는 예쁜 쓰레기 같은 기념품을 사고 싶은 충동.
그 비합리적이고 쓸모없는 ‘원함’들이 모여, 비로소 ‘나’라는 사람의 윤곽을 다시 그려낸다. 남들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왜 비싼 돈을 주고 가서 공원 벤치에만 앉아 있느냐고.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쓸모없는 시간 동안, 내가 잃어버렸던 나의 이름과, 나의 취향과, 나의 웃음을 다시 주워 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이제 여행지에서 더 이상 ‘본전’을 찾지 않는다. 인스타그램에 올릴 화려한 사진 한 장이 없어도 괜찮다. 그 대신 내 마음속에는, 런던의 축축한 흙냄새와, 템즈강의 차가운 바람과, 낯선 이방인이 건넨 따뜻한 눈인사가 가득 차 있다. 기록으로 남지 않아도, 누구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내 안에 스며든 그 햇살만으로 충분하다.
햄스테드 히스의 벤치에서 일어난다.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다. 지도에 없는 골목을 헤매고, 계획에 없던 비를 맞으며,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사치스럽게 나의 시간을 낭비할 것이다. 부엌을 탈출한 여자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은, 바로 그 ‘쓸모없음의 자유’를 만끽하는 일이니까.
나는 천천히 운동화 끈을 다시 묶는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 채로, 그러나 가볍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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