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이 여행을 떠나야 하는 이유(3)

70세 왕언니의 T팬티, 우리의 밤은 낮보다 솔직하다.

by 양수경


여자들끼리의 여행, 진짜 하이라이트는 '밤'이다.


낮 동안 낯선 도시의 골목을 누비느라 지친 다리를 뻗고, 꽉 끼는 청바지 대신 가장 편하고 헐렁한 잠옷으로 갈아입는 시간. 손에는 시원한 맥주 한 캔이나 와인잔이 들려 있고, 안주는 그보다 더 맛있는 '수다'다.


남편 흉보기, 시댁 이야기, 자식 걱정 같은 단골 메뉴가 한 바퀴 돌고 밤이 으슥해지면, 비로소 진짜 이야기들이 봉인 해제된다. 점잖은 낮에는 차마 꺼낼 수 없었던, 날 것 그대로의 이야기들이 쏟아지는 것이다.


이번 여행의 가장 충격적이고도 사랑스러운 반전은 70세가 넘으신 '왕언니'에게서 터져 나왔다. 우리 중 가장 연장자이자, 평소엔 우아하고 점잖으신 왕언니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시는데 손에 든 속옷의 형태가 심상치 않다. 손바닥만 한 천 조각, 아니 끈이라고 해야 할까? 말로만 듣던 'T팬티'였다.


"어머, 언니! 그게 뭐예요?"


동생들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왕언니가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지셨다.


"이거? 여행 다닐 땐 이게 최고야. 빨아서 널면 30분이면 마르거든."


세상에, '섹시함'이 아니라 '건조의 효율성' 때문에 T팬티를 입는 70대라니! 우리는 침대 위를 구르며 자지러졌다. 하지만 왕언니의 무용담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내가 처음에 이걸 선물 받고, 깜빡하고 교회 구역 예배에 입고 갔잖아. 화장실에서 일어서는데, 맞은편 거울 속에 웬 여자가 저런 망측한 걸 입고 서 있는 거야."


언니는 잠시 말을 멈추고 킬킬 웃으셨다.


"내가 너무 놀라서 '어머, 저 여자 좀 봐!' 하고 쳐다봤는데, 다시 보니 그게 나더라고. 입고도 잊어버린 거지. 화장실 안이라 아무도 없는데도 얼마나 민망하고 창피하던지, 꼭 누가 보고 웃는 것 같아서 혼자 얼굴이 벌게져서 나왔어."


그날 밤, 숙소가 떠나가라 웃으면서 나는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나이가 들수록 '체면'이라는 속옷을 겹겹이 껴입고, 점잖은 척, 근엄한 척 자신을 포장하기 바쁘다. 하지만 여행지에서 우리는 그 무거운 갑옷을 기꺼이 벗어버린다. 70대 노년에도 T팬티의 민망함을 깔깔거리며 이야기할 수 있는 명랑한 소녀가 우리 안에 여전히 살고 있음을 확인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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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엄마 손을 잡고 갔던 읍내 목욕탕이 생각난다. 뿌연 수증기 사이로 동네 아줌마들의 알몸이 보이고, 가끔 탕 안에서 마주친 남자 동창생 때문에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숨기 바빴던 그 시절. 그때의 나는 내 몸이 부끄러웠고, 남의 시선이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다르다. 쭈글쭈글해진 주름도, 처진 뱃살도, 그리고 엉덩이가 다 드러나는 T팬티조차도 웃음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


부끄러움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뻔뻔함'이 아닌 '자유로움'이 들어찼다. 타인의 시선보다 내 '편리함'이 중요하고, 남들의 평가보다 우리끼리의 '즐거움'이 더 소중해진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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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누구나 한두 개쯤 감추고 사는 찌질함과 흑역사가 T팬티 한 장을 핑계로 세상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서로의 웃지 못할 그림자들을 안주 삼아 나누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삶의 평범함과 우스꽝스러움을 기꺼이 껴안게 된다. 화장기 없는 민낯의 우리를 마주할 때 비로소 나 자신과 타인에게 조금 더 관대해지는 기적. 그 밤의 에어비앤비 거실은 어떤 훌륭한 심리 상담실보다 완벽한 치유의 공간이었다.


문득 버지니아 울프가 여자에게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누구의 아내도, 누구의 엄마도 아닌 오직 ‘나’로 존재해도 되는 공간. 이 낯선 도시의 좁은 방이 바로 오늘 밤 우리의 방이었다.


영화 〈Thelma & Louise〉에는 평범한 두 여자가 여행길에 올랐다가 결국 자기 삶을 스스로 선택하게 되는 이야기가 나온다. 차 안에서 시작된 대화가 그들의 운명을 바꾸는 장면. 그날 밤, 우리 숙소의 침대 위도 작은 자동차 안과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더 솔직해졌고,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


왕언니가 툭 던진 한마디에 막내 Y가 소리쳤다.


"언니, 저도 귀국하면 당장 T팬티 살 거예요! 빨래 빨리 마르는 게 최고죠!"


창밖에선 가로등 불빛이 노랗게 흔들리고 있다. 우리는 또다시 와인잔을 기분 좋게 부딪쳤다. 점잖은 낮보다 솔직한 밤, 우리의 여행은 T팬티 한 장으로 인해 완벽하게 무장 해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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