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이 여행을 떠나야 하는 이유(1): 부엌 탈출

하기 싫은 것을 안 할 자유

by 양수경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 “여행이 왜 좋아요? 낯선 풍경? 새로운 경험?” 물론 그것도 맞다. 하지만 여자들, 특히 수십 년간 가족의 식탁을 책임져 온 중년의 여자들에게 여행이 필요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첫 번째 이유를 이렇게 적는다.


‘부엌으로부터의 망명.’


짐을 싸서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우리는 단순히 집을 떠나는 게 아니다. “오늘 저녁 뭐 해 먹이지?”라는, 24시간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돌봄의 컨베이어 벨트’에서 과감히 뛰어내리는 것이다.


여행지에서 눈을 뜰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오늘 뭐 해 먹이지?”라는 주부의 질문이 아니다. 대신 “오늘 남이 해준 뭐를 먹을까?”라는 순수한 설렘이 그 자리를 채운다. 매일 회사 구내식당에 가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피곤한 선택일지 몰라도, 24시간 부엌에 매인 이들에게는 기적 같은 자유다.


호텔 식당에 내려가 하얀 접시 위에 스크램블 에그와 구운 버섯, 따뜻한 토마토를 담아 자리에 앉는다. 도마 소리도, 싱크대 물소리도, 냄비 뚜껑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없다. 하얀 린넨 테이블보 위엔 오직 접시와 포크가 부딪히는 경쾌한 소리뿐. 누군가 “Coffee or Tea?” 하며 내 테이블까지 따뜻한 잔을 서빙해 준다. 입안으로 향긋한 커피가 넘어가는 순간, 나는 비로소 실감한다.


‘아, 나 지금 부엌에서 탈출했구나.’


나이가 들수록 좋은 점 하나는, 억지로 입고 있던 ‘역할’이라는 옷을 잠시 벗어두는 요령이 생긴다는 것이다. 아내, 엄마, 며느리, 직장인…. 내 어깨를 누르던 무거운 이름표를 현관 앞에 잠시 내려놓고 떠나는 여행. 친구들과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다. 우리의 여행은 낭만이 아니라, 아주 현실적이고 절박한 **‘가사 노동 망명’**에 가깝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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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 멤버 중 한 명인 T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얘들아, 너네는 집안일 중에 뭐가 제일 싫어?” 청소, 빨래, 정리… 여러 대답이 나올 법도 한데, T는 정색을 하고 스스로 답했다.


“나는 밥 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어. 특히 밥솥 취사 버튼 누르는 거.”


우리는 잠시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야, 너 대학 때 전공이 식품영양학 아니었어? 영양사 면허도 있잖아.” 영국에 오기 전까지 그녀는 식단을 짜고 영양을 분석하는 전문가였다. 그런 그녀가 밥 하는 게 제일 싫다니. 하지만 이어진 그녀의 말에 우리는 웃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 때 기억 안 나? 남편은 재택근무 한다고 하루 종일 집에 있지, 다 큰 아들 둘은 학교 안 가고 방에만 처박혀 있지. 하루 세끼를, 그것도 건장한 남자 셋을 위해 꼬박 차려내는데… 나중엔 밥솥에서 ‘치익-’ 하고 증기 빠지는 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턱 막히더라.”


전문가조차 질리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삼시 세 끼’의 위력이다. 요리 자체가 싫은 게 아니다. T를 지치게 한 건,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 반복’이었다. 아침 먹고 돌아서면 점심 설거지가 쌓이고, 점심 치우고 나면 “저녁엔 뭐 먹어?”라고 묻는 순진하고도 잔인한 가족들의 눈빛. 그 굴레 속에서 우리는 종종 ‘나’를 잃어버리고 ‘밥 짓는 기계’가 되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부엌에서 아주 멀어지기 위해 비행기를 타는지도 모른다. 부엌에서 멀어질수록, 나는 나에게로 가까워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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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친구들과의 여행은 치유다. 우리는 식당에 들어갈 때마다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얼굴로 메뉴판을 정독한다. 집에서 메뉴판(식단)은 ‘고민(숙제)’이었지만, 이곳에서 메뉴판은 ‘구경(축제)’이다. “이거 먹어볼까?” “아니, 오늘은 그냥 아무거나 시키자. 망해도 상관없잖아.”


‘망해도 된다’는 말. 내가 한 요리가 맛없어서 가족들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그 가벼움이 얼마나 짜릿한지. 우리는 “오늘 설거지 누가 해?”라는 질문이 사라진 식탁에서, 밥알 하나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먹는다.

설거지를 하지 않는다는 건, 단순히 손에 물을 묻히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언제나 나에게 자동으로 배정되던 ‘돌봄의 당직표’에서 내 이름이 잠시 지워진다는 뜻이다. 숙소로 돌아와 늦은 밤까지 수다를 떨던 중, 누군가 나지막이 말했다. “우리… 왜 이렇게 좋지?” 그 말의 밑바닥에는 아마도 이런 문장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나 오늘, 엄마도 아내도 아니고… 그냥 나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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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짧다. 우리는 다시 런던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집으로 돌아가면 냉장고는 텅 비어 있을 것이고, 싱크대에는 남편과 아이들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컵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행을 떠나기 전과는 조금 다를 것이다.


내가 평생 부엌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가끔은 이렇게 문을 박차고 나와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으니까. 부엌을 잠시 떠나봐야, 다시 부엌으로 들어갈 힘이 생긴다. 여행지에서 낯선 풍경을 보며 마신 공기가 내 안의 환풍기가 되어, 꽉 막혀 있던 마음의 냄새를 빼내 주었으니까.


현관문을 열자 익숙한 집 냄새가 난다. “엄마 왔어?” 하고 달려 나오는 아이를 안아주고, 나는 주방으로 들어가 앞치마를 두른다. 이제는 억지로 밥을 짓는 게 아니라, 내 힘으로 다시 따뜻한 불을 켤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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