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갑자기 침대에 엎드리더니 펑펑 울었다.
우리 엄마는 교회에 매일 출근하는 전도사님이었다. 요즘 말하는 워킹맘이었다. 어렸을 땐 몰랐는데 내가 주부가 되어보니 그때의 젊은 청년이었던 엄마가 어떻게 살았는지 뭔가 짠하기도 하면서 슬프기도 하면서 존경심이 든다.
엄마의 아침은 새벽 3시 50분에 시작되었다. 엄마는 키가 작았지만 큰 차들을 운전하며 다녔다. 50분 거리의 교회를 가며 사람들을 태웠고, 새벽 예배가 끝나면 그대로 사람들을 데려다주고 집에 왔다. 그러면 전날 아빠가 난리 친 집의 유리들을 울면서 쓸어 담았다. 그리고 우리 가족의 아침을 차렸고 우리가 등교하면 다시 50분 거리의 교회에 출근을 했다. 그리고 퇴근하면 집으로 와서 우리의 저녁을 차렸다. 그리고 밤새 자지 못한 채 새벽에 또 길을 나섰다.
아직도 한 장면이 정확히 기억난다. 어느 날은 학교가 가기 싫어서 엄마한테 학교에 안 가겠다고 했는데 엄마가 갑자기 침대에 엎드리더니 펑펑 울었다.
“정말....... 힘들다.........”
나는 엄마가 기도할 때, 아침에 흐느끼며 깨진 유리를 치우는 건 몰래 봤지만 엄마가 대놓고 우는 모습은 처음 봤다. 당황한 나는 너무 놀라서 가방을 가지고 뛰쳐나왔다. 그리고 꺼이꺼이 울었다. 어린아이였던 나도 엄마가 너무 안쓰러워서 불쌍해서..
엄마는 사랑이 많으신 분이었다. 거친 아빠 밑에서도 내가 숨 쉴 수 있는 이유는 엄마의 사랑 때문이었다. 나는 알탕을 참 좋아했다. 알탕이 먹고 싶을 때 엄마는 나를 마트로 데려가 알탕 아주머니에게 “오늘도 5천 원어치만 주세요” 하면 아줌마는 “무슨 어린애가 이렇게 알탕을 좋아해?”하고 웃으셨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알탕을 좋아한다 그리고 알탕을 볼 때마다 마트에 함께 갔던 그 장면이 생각난다.
엄마는 사랑이 많으신 분이었지만 너무 바빴다. 내가 유치원 때 교회 안에 있는 유치원에 다녔는데 항상 나는 언니와 꼴찌로 나왔다. 우리가 나올 때 선생님도 나오셨고 그때서야 유치원의 불이 다 꺼졌다. 한 날은 학교에 다녀오면 항상 엄마가 없었는데 어느 날 학교에 돌아와 보니 엄마가 내가 좋아하는 오징어 튀김을 하고 있었다. 아직도 그 기름 냄새를 잊지 못한다. 그때 너무 행복했어서 가슴이 벅차다는 말이 뭔지 알겠던 내 모습을 잊지 못한다.
나는 소극적인 아이였다. 그래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학교가 끝나면 깔깔깔 웃으며 노는 친구들 사이에서 바람같이 뛰어서 깜깜한 집에서 쭈그려 앉아 드라마를 보는 우울한 어린아이였다.
모든 아이들이 코믹한 드라마나 만화를 볼 때 나는 슬픈 어른 드라마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 드라마를 보며 울면 어린 나였어도 응어리가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그때의 내 모습을 오은영 박사님이 보신다면 아마 소아 우울증이라고 진단하지 않으실까 생각한다.
나중에서 말하겠지만 내가 정말 큰 사고를 쳤을 때 엄마는 네가 미쳤구나 생각이 있니 없니 하는 엄마가 아니었다. "네가 제일 많이 힘들었겠다. 넌 괜찮니?"라고 묻는 좋은 엄마였다.
나는 물었다. "엄마 왜 나한테 화 안 내? 화나지 않아? 나는 머리채 뜯길 줄 알았지" 엄마는 말했다
"지금 제일 힘든 건 너야 내가 널 걱정하지 않으면 누가 널 걱정하니"
우리 엄마는 키는 작지만 누구보다 강하고 담대한 작은 거인이었다. 그리고 아빠가 어떤 극단적인 행동을 해도 이혼하겠다는 말 한마디 안 꺼내던, 오히려 우리에게 아빠를 세워줬던 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작은 거인의 딸은 방치된 채 중학생이 되어도 알파벳을 모르는 아이로 자랐고, 아이들이 바보라고 손가락질해도 슬프거나 화나지 않는 감정이 없는 외롭고 고독한 아이로 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