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애 낳고 계속 사회생활 할 수 있는 직업은 공무원밖에 없어.” 이 말을 들은 지도 어언 10년이 다 되어간다. 우리 아빠로부터 말이다. 아빠는 우정직 공무원이다. 쉽게 말하면 우체국에 소속된 공무원으로서 집배원이시다. IMF가 터지기 전, 할머니 할아버지께선 삼남매 모두 다 끝까지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 그래서 큰아버지와 고모 두 분 다 대학에 진학하셨다. 하지만 우리 아빤 대학을 보내주신다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말에도 불구하고 바로 일을 하고싶어 했고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할 수 있었던 공무원 일을 그때부터 시작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땐 공무원 월급이 일반 기업들보다도 현저히 낮은 수준이었고 지금처럼 사회적 인식이 좋은 편도 아니었다. 또 다른 공무원이신 내 친구 아버지께선 대기업을 다니고 계신 친구분한테 “너 그 월급으로 먹고 살 수는 있니?”라는 말을 들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안 가 imf가 터지면서 그렇게 무시 당하던 ’공무원‘의 위상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아빤 그런 자신의 위치를 자랑스러워했다. 전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본인이 퇴사를 하지 않는 한 잘릴 일이 없는 공무원의 특성은 한 가정이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고 본다. 남들보다 특출나게 잘 사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부족하게 생활하진 않았다. 또 지금에서야 중시되는 ’워라밸‘은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잠에 들고 취미로 운동까지 해야 하는 아빠에겐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것이었다. 그런 직장생활 속에서 아빠는 동료 여자 공무원들의 삶을 가까이 지켜보면서 내 딸도 이렇게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게다가 내 입으로 말하긴 좀 민망하지만 전교권에 항상 들고 명문대까지 진학한 딸이 당신은 못했던 고위공무원이 되어 더 좋은 사회적 시선을 받고 살기를 바라는 아빠의 마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어렸을 땐 그런 아빠의 생각과 말에 일방적으로 공감을 했다. 정년보장, 육아휴직, 연금 등 들으면 들을수록 좋은 점만 보였고 10대까지 나의 장래희망은 초등학교 교사, 중학교 교사, 문체부 직원 등 공무원의 바운더리 내에서 벗어나질 않았다.
하지만 내 나이의 앞자리가 1에서 2로 바뀌면서 세상을 보는 나의 눈도 달라지게 되었다.대학생이 되면 멋지게 삶을 기획하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나에게 4년의 대학생활은 ‘인생은 산 넘어 산‘이라는 교훈을 주기 바빴다. 열심히 공부했고 그 결과 목표한 대학에 입학했지만 공허함이 내 마음속에 크게 자리 잡았다. 학교에서 나와 사회로 나오니 나보다 잘난 사람들은 차고 넘쳤고 세상은 더 복잡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언제나 내 옆엔 지도가 있었고 그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됐는데 목표가 사라지며 지도 역시 사라졌고 내가 가야할 길 역시 없어졌다.
이런 나의 대학생활 중 가진 아빠와의 식사 시간은 메말라 있던 내 삶을 더 옥죄는 느낌이었다.
”휴학 없이 졸업하기 전에 취업은 당연히 해야 되는 거고, 아빠는 공무원 말고 사기업 대기업은 싫다. 한다 해도 공기업까지만이야.“
나는 이런 아빠의 말에 묵묵부답할 수밖에 없었다. 삶의 의욕 자체가 없던 나에게 이 말은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고 ‘그동안 너를 이렇게 키워준 만큼 너도 당연히 내 기대에 부응해야 된다’는 아빠의 보상심리에 난 반항심만 생길 뿐이었다.
그렇게 아빠와 나 사이에는 불통이라는 커다란 벽이 생겨났다. 이런 나를 보며 아빠는 1학년이고 어려서 세상을 아직 잘 몰라서 그런 거라고 3, 4학년이 되면 본인의 말을 이해할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난 고학년이 되면서 내가 얼마나 세상을 좁게 바라보고 살아왔는지만을 느낄 뿐이었다.
대학에 합격해 지방을 떠나 도시에서 살게 된 건 3년 전부터이다. 19년 동안 살았던 내 고향은 중소도시라고는 하지만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알 정도로 작은 도시였다. 이 말인즉슨 내가 어떤 학교를 다니고 어느 정도의 성적을 받고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까지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한 사람의 익명성이 지켜지기란 쉽지 않은 곳이었다. 그래서 난 어렸을 때부터 친구들과의 관계를 조심스러워했고 혹여나 나에 대한 평판이 부모님한테나 또는 낯선 사람에게 부정적으로 전달되진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결국 이렇게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아간다는 건 내가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은 아주 제한적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반면 도시에서의 생활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공존함에도 불구하고 이때까지 느껴보지 못한 자유와 해방감을 느끼는 듯했다. 학교 시험을 망쳐도, 수더분한 차림으로 집밖을 돌아다녀도, 술을 먹고 취한 채 거리를 걸어다녀도 그 누구의 시선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익명성의 보장은 사람들이 보는 ‘나’가 아닌 내가 생각하는 ‘나’에 대해 고민하고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해주었다.
그 결과 나는 타인의 시선에서 벗아나 자유로움 삶의 형태를 좀 더 누려보자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가야할 길은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프리랜서로서의 삶이었다.
반대로 공무원이 되면 아빠가 말했던 여러 가지 혜택들을 누릴 수 있겠지만 또다시 나는 익명성을 보장받지 못하며 살아갈 것이다. 과연 내가 정년이 될 때까지 그걸 견딜 수 있을까? 그리고 은퇴를 하고 자유롭지 못했던 지난날의 삶을 후회 안 할 자신이 있을까? 예상컨대 답답함에 못 이겨 퇴사를 하고 견딘다 한들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후회할 것 같았다.
올해 나는 대학을 졸업했고 내가 관심있던 분야에서 프리랜서로 일을 하고 있다. 가끔씩 아빠가 술에 취해 “아빠 친구 딸들은 시험 잘만 합격해서 공무원 하던데.”라는 말을 하곤 한다. 과거엔 이 말을 들었을 땐 아빠에 대한 적개심만 가득했지만 내가 공무원이 아닌 프리랜서여야 하는 이유가 ‘나’를 위한 것이고 앞으로의 내 삶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아빠의 그런 푸념에 비록 무응답이지만 긍정도 부정도 아닌 옅은 미소로 넘길 수 있게 됐다. 언젠가 아빠도 내 선택이 옳았다는 게 아니라 나를 위한 것임을 알게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