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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지 않게 살아가는 방법

희생


유년 시절


언제 적이었을까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저 기억해보자면 아마도 내 키가 TV 다이 위에 올려진 TV에

팔꿈치를 간신히 올릴 수 있는 정도의 나이가 아니었을까 싶다.


저녁마다 방안 가득 자욱이 차오르던 담배연기와 술냄새 그리고 피 터지게  물어뜯는 고통스러운 향연 속에서 나는  안방 한켠에  창호지로 분리됐던 한쪽 모서리에서 “지직 지직” 소음을 내는 낡은 텔레비전 소리에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한쪽 귀로는 아버지의 연장 소리와  도망가는

어머니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절박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어머니는  나를

떠나기로 마음먹으셨던 듯하다.


또 다른 한쪽 귀로는 시끄러운 뉴스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은  뉴스 속의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참으로 불공평하고  억울하게 느껴졌다.

마치 모든 일이 나와는 아무 연관이 없는 것처럼

가볍고 냉정하게  외면하게 된다.


모든 것이 차가웠다. 차갑다면 차가웠고  외롭다고

선택했다면 충분히 외로웠을 것이다.


긴 긴 이야기를  생략하고  어찌 되었건 나는

캄캄한 유년시절 학대와 갖은 사고를 지나

결국  혼자가 되었다.



상처는  또 다른 깊은 상처로  덮었다.




삶을 살아가면서 어떠한 문제나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이상하리만치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바보 같은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경험을  종종 하곤 한다.


예를 들면, 가족끼리의 식사에 초대받을 때 라던지

자신감 있게 의견을  내세워야 하는 자리에서 이유 없이 위축되고 소외감을 느끼는  머저리 같은  나를 느끼게 되는 순간이랄까......

그 외에도 참 많지 않은가,  거울 속의 내가 아닌,

집 문 앞 한 발자국부터 매일 아침 새로 쓰는 가면과

액세서리들.  아름다운 나를 돋보이게 함이 아닌

수치스러운 내 모습을 가리는 stuffs.


그런 나를 나는 혐오한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

여러 말 같지도 않은 작은 상황 속에서 발견하는

나의 무화과 나뭇잎이다. 나의 커다란 수치를 겨우

나뭇잎 따위로  대강 가리며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모습.


해가 지고  캄캄한 밤이 오면  무거운  갑옷을  벗고

나만의 공간에  털썩 주저앉는다.  

눈물은 더 이상  흐르지도 않는다.


텅 빈 어린날의 공간은  메말라 갈라진 나의 자아에

큰  트라우마들을 안겨주어  그대로 성장이 멈춘

“어른 아이”를 만들어 버렸다




아픔을 극복하기 위한 몇 가지 노력들  


잊어보려고 꽤나 많은 노력을 했었다. 부모님의 학대. 친동생의 학대.  통째로  잃어버린 학창 시절.

. 병든 자아 무너진 사회생활.  상처는 상처를 낳고

더 큰 상처로  곪아 터져  더 이상은 살아갈 이유가  존재하지 않은 구제 불능의 인간이 되었었다.


“되었었다.”..


이 삶이 끝나면  영원한  평강이 올 줄 착각하고

내렸던  수많은 결정과 행동들.


바보 같은 짓은  지울 수 없는 흔적만 남기고

더 아파지기만 했었다.


죽지 못해 산다고 했던 말들이  마음에 남아 스스로에게  최면 아닌 최면도 걸었었다. 다 꿈이었노라고..

그들도  그곳도 그 상황도 전부 거짓이었다며 스스로에게 매일 되뇌었었다.

그로 인한 효과에서였는지  오늘 눈감으면 내일 눈뜨지 않았으면 했던  무기력했던  삶에서는  조금씩  벗어나는 듯했지만  어려움이 찾아오면 금 새  다시 무너지고 말았다.  꼭  길 가에 떨어진  씨앗처럼

싹도 틔워보지 못하고 나의  소망은  작은 어려움 앞에  바람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잊을 수 없다면  복수하리라.  

많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기도 한 것 같다.  보란 듯이  잘 살아서  보여주자고.  역시 그 또한  바람결에 날아가 버렸다.


어느 순간부터  나의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왜  내  삶을  살고 있지 못하는 것일까.

지나간 일에 매여  여전히 아파하며  나를  가두어 주는 것일까. 진정  나를 고통스럽게 한 것은 그들이고

그 상황이었을까..?

나의 뇌리를 스치며 뼈를 때리듯 아픈 깨달음이 왔다. 그리고  큰  소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자유함에 대한 갈망이 내 안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나를 가장  아프게 한 것은  바로  나였다.


눈을 감고  고요함 가운데 나를 맡겨 보았다.  

캄캄한 방 안에서  울고 있는 7살 배기  소녀가 보였다.  차가운 바닥   겨울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깨진 창문 사이로 들려오는 개들의 울음소리..

달빛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어린 소녀의 핏자욱

얇디얇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소리마저 들킬까

끅끅  울음을  삼키는 야윈 몸  


어린 시절의 나였다.  아무도 안아주지 않았다.

나조차도. 지금 나는  나를 안아줄 수 있었다.  다른 누가  말해줄  필요도 없었다.  내가 입고 있는 따듯한 외투를 벗어  어린 시절 나에게 입히어  나의 체온으로  나를 꼭  안아주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몸이  안정을 찾을 때까지  깊숙이 안아주고는  두려움 가득한 눈을 바라보며 말해주었다.


“괜찮아  네 탓이 아니야”


그렇게  먼저 나는  성장이 멈춘  어린 시절의

나와  화해를 했다  




무언가  맘속 깊은 곳에 자리 잡아 살던  큰  곰이

나간  느낌까지 들었다.  그리곤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말하게 되었다.  

“오늘도  참  사랑스럽구나.  오늘도  이겨내게 될 거야.. 이제 넌  혼자가 아니야”


많이  사랑스러워지고  어두웠던 마음이 밝아졌다.

정말  큰 변화였다.  하지만  여전히  가슴속 응어리는  세상을 살아가야 할 나에게 많은 부작용들을

가져다주었다.


자기 일을 차일피일 미루며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을 볼 때의 분노.  권력을  남용하며 허세를 부리는 남자들을 볼 때의 경멸. 누구에게도  쉽사리 마음을 열지 못하는 답답한 내 모습. 철저한  자기 방어.


여전히 그 뿌리는  어린날의 아픔임에  치가 떨렸다.

또다시 죽어야만  이 사슬이 끝나는 것인가  고통에 시달리며  몇 년을  지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때부턴가  정말  제대로 살고 싶은  울부짖음이 시작되었고,  긴 긴  부르짖음의 끝에  나에게 떨어진  해답이 있었다.

매우  무거운  선물이었는데,  그것은  “용서”였다.


그 해답과 함께  수년 전부터 썩어 묵혀있던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온갖 더러운  원망과  경멸  혐오 증오가  함께  쏟아지게 되었다.

공격할 대상도 없이  혼자 그렇게 맨바닥에  그 오물들을  쏟아내고  비워진  “나”라는 그릇에  덩그러니

남겨진  단어를  찾게 되었다.

“선택”이라는  단어였다.  용서는  선택으로 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감정에 앞서  나의 지식과 이해로  선택에까지  이어지는 것이 아닌.  용기 있는 선택을 통해  나의 감정까지  장악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무겁지만  소중한  그 열쇠를  들고 나는 나에게  선포했다.   

“이 시간부터 나는  ㅇㅇㅇ를  용서하기로  선택한다.  그리하여  그와 연결된  내 삶의 모든  부당함 들을  끊기로  결단한다”

그리고 그 순간  느꼈다.  무겁디 무겁던  자물쇠가  툭  열리고  나를  숨 막히게 옭아매던  사슬이 힘없이  

끊어졌음을...




약함을  인정할 때에  비로소  강해진다



큰  응어리들이 사라져 어느덧  만성 통증처럼  

내 안에  자리했던  명치의 욱신 거림은  더 이상  

없다.   마음에 빛이  자리하기  시작하니  얼굴빛도  

밝다.   


내 안에  멈춰있던 아이도 이제  어느덧 뛰놀며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도 한다.  

“공부하고 싶어”

“다른 곳도 가보고 싶어”

“입어보고 싶어”

“맛보고 싶어”


적당히 상황이 허락되는 한.  그리고  무엇에든지

결과가  아름답게 감사로 마무리할 수 있는 선에서  나는  어린 나에게  채워줄 수 있는 부분들을  채워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다른  작은 난관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게 되었다.   한  남자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이젠  경멸도 혐오도  분노가 아닌  “설렘”과 함께  사랑이 아닌  좋아함을  시작하게 되었다.

두근거림과 함께 나는  내 안의 어린아이와  이상한  

꿈을 꾸며  그 와의  사랑을  상상해 나갔다.


“난  그 사람이  좋아. 그러니  그가 날 더  안아주고

사랑해주고 아껴주면 좋겠어 “


해괴한  상상은  행동으로 이어졌고  그 설레는

마음은 다시  바닥으로 치닫게 되었다.

왜  그는  내가 바라는 만큼 날 사랑해주지 않는 걸까?  왜 그는 조금 더  다정하게 나를 대해주지 않는 걸까?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만큼  그는 날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  

난  사랑받지 못했기에  그가 더  나를 사랑해주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그는 날  사랑하지 않는 듯하다.


또다시  감정선에서 난  크나큰  오류를 범하고

아름다운 관계에  얼룩을  그려내고 있었다.


내게 비워진  사랑의 자리는  어떤 것으로도  스스로  채울 수가 없다.  사랑은  받는 것으로는  절대 채울 수 없다.   사랑은  내가  주어야만  채울 수 있는 것이다.


용서는  선택인 것과 같은 개념이다.  

사랑도  주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나의 아픔과 약함을  잘 알듯이  누구에게나  그런 부분이 있다.  내가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했던  그 시점의 그 남자에게도   아픔과 약함이  있다.

왜  사랑이라 착각했다 말할 수 있는가 하면 ,  그때에 나는  그의 아픔을 바라보지도 못하였고  보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이라 함은  상대의 아픔을  보고  함께 아파할 뿐만 아니라 ,  그가  그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나를 배신할 지라도  끝까지  묵묵히  사랑해줌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때에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또다시  사랑하기로 선택한  이후에

말할 수 없이 큰  사랑이 내 안에서  솟구치게 되었다.   사랑받지 못하고 컸던 나는  그를  어떠한  상황에도  믿고 사랑하는  그의 아내가  되었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음은  배신과 고난의 시간에도

나에게 상처로 남기지 않고  더 큰  사랑으로

안아주게 되어  이제는 그도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끔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사람들에게로..



살다 보면  시시비비를  가려야만 할 일들도 많이 겪게 되고  하루에도  수백 번  생각과 감정선을  넘나드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얽혀있다.

그것이 기쁜 일이기도 하고  때로는  슬프거나

화가 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에게는 모든  감정들을  다스릴  힘이  있다는 것이다.   어두운 감정들은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여 나는 자유하고  그 일의 태도가 합당하게  스스로 느껴질 수  있을진 몰라도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부정적인 감정에 따른 선택은  대가가 뒤따른다는 것이다.

상대와 나에 대한  묶임 ,  그리고 그것이  나의 자녀에게 까지 미치는  쳇바퀴 같은  악의  띠가  되어버리고 만다.  


모든 사람은 완전하지 않다.  내가 늘  수만 가지의

감정의 소용돌이에 살듯  그리고  밥먹듯이 실수하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며  누군가에게는 참으로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이듯 ,  살아가며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러하다.   

완전하지 않지만  소중하다는 전제하에  사람과

상황을  바라보자.  


용서 못할 것도 없고  사랑하지 못할 것도 없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늘 나는  누군가에게

은인이 되어 있을 수도 있고,  죄인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용서하라,  용서함을 받게 될 것이다.

사랑하라,  사랑받게 될 것이다.

주면 줄수록  더  받게 될 것이다.



이 땅에 아프지 않게 살아가는 방법은 없다.

아픔은  더 넓고 깊게  신뢰하고 사랑하는  좋은

도구가 되어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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