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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Apr 18. 2024

벚꽃 산책, 봄을 즐기는 법

[4월 둘째 주 일기] 




나의 기억 속에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는 벚꽃놀이는 2021년, 봄의 제주에서였다. 1년 제주살이를 막 시작하면서 제주에서 유명하다는 벚꽃놀이 명소는 여럿 다녀봤지만, 딱 한 곳만 고르자면 제주 종합경기장 옆에 있는 벚꽃 숲이 나의 원픽이다.      


종합경기장 주변, 어르신들이 게이트볼을 즐기는 야외 경기장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이 계절에만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벚나무 숲이 나타난다. 보통 유명한 벚꽃 명소는 가로수길인 경우가 많은데, 여기는 벚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어서 온전히 자연 속에서 머무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바닥은 초록빛 풀들로 가득하고, 고개를 들면 핑크빛 벚꽃으로 가득한 풍경이 펼쳐진다. 바람이 불 때마다 벚꽃 잎이 흩날리는 장면은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걸을 때마다 꽃비로 샤워하는 기분이었다. 특히, 평일 오전에 방문해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지 않아, 혼자만의 시간을 오롯이 즐길 수 있었다.      


서울로 돌아오고 나서도 봄이 오면 종종 천국 같았던 그날의 벚꽃 숲이 떠올랐다. 언젠가는 다시 가봐야지 다짐했는데,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나에게 벚꽃 보러 제주까지 날아갈 여유가 있을 리가!) 어쩌면 그래서 더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있나?’는 현재 내가 건강하게 잘 살고 있는지, 마음에 여유 공간이 있는지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 가운데 하나다. 당장 제주행 비행기는 못 타더라도, 지금 나의 생활 반경 안에서 계절의 변화를 놓치지 않으려고 나름 애쓰며 살고 있다.             


특히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지금 이 시기를 가장 좋아한다. 벚꽃이 피었다가 지는 일주일 남짓 동안, 계절의 변화를 가장 극적이고 아름답게 체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하얀 꽃망울을 터뜨리면서 압도적인 에너지를 뿜어내는 벚꽃을 마주해야 봄이 왔다는 사실이 비로소 실감 난다.     


벚꽃놀이를 하려면 때를 놓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지난해에는 예년보다 꽃이 너무 일찍 피는 바람에 보러 가기도 전에 다 지고 말았다. 봄이 스쳐 지나가 버린 느낌이 들어서 어찌나 허탈하던지... 벚꽃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은 꽃이 만개한 이후로 일주일, 길어야 열흘 정도다. 물건으로 치면, 시즌 한정판 같은 거다. 이 시기에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올해는 유명한 벚꽃 명소를 찾아가는 대신 가까운 동네 벚꽃길을 자주 산책했다. 우리 동네에는 굳이 멀리서 찾아올 이유는 없지만, 주민들이 사랑하는 아름다운 벚꽃길이 있다. 천을 따라 줄지어 늘어선 벚나무들이 만들어낸 벚꽃터널이 아주 멋지고, 무엇보다 사람들로 북적거리지 않아 여유롭게 산책할 수 있어서 좋다.    

 

원래 산책하는 걸 좋아하지만, 이 계절에는 도저히 걷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벚꽃이 피어있는 일주일 내내 틈만 나면, 벚꽃길을 따라 걸었다. 주말 오전에는 아이들과 함께 걷고, 오후에는 혼자 걸었다. 벚꽃 터널을 따라 한참 걷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펍에도 들렀다. 살짝 땀이 날 정도로 신나게 걷고 나서 마시는 맥주는 벚꽃놀이의 완벽한 마무리였다.      


  

  


주중에도 점심시간에는 회사 근처 공원을 걷고, 퇴근 후에는 다시 동네 벚꽃길에서 산책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혼자 걷는 시간이 참 행복했다. 꽃비를 맞으며 마지막 산책을 마치고 나니, 겨울에서 봄으로 모드 전환이 끝난 느낌이 들었다.   


올해는 일주일 동안 봄맞이에 최선(?)을 다했다. 벚꽃이 만개한 순간부터 꽃잎이 떨어지는 순간까지, 낮과 밤의 산책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이 봄의 에너지로 여름과 가을, 겨울을 나고 다시 봄을 맞을 때까지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내년엔 그리운 제주벚나무 숲에 다시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가지 못한다고 해도 그리 슬프진 않을 것 같다. 나에게는 매일매일 걸을 수 있는 우리 동네 벚꽃길이 있으니까. 내년에는 새벽에 자전거 타고 아무도 없는 벚꽃길을 신나게 달려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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