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셋째 주 일기] 세월호 10주기를 맞아...
2021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 뉴스 속보를 보는 순간, 갑자기 숨을 쉬기 힘들었다. 말로만 듣던 호흡곤란 증상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리고, 내가 갑자기 왜 이럴까 싶을 정도로 몸도, 마음도 말을 듣질 않았다. 그러다가 혹시... 그 일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2014년 4월 16일, 나는 급하게 진도로 내려가고 있었다. 수백 명이 모여 있는 체육관에 처음 도착했을 때만 해도, 모두가 가족들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희망 속에서 애타게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구조작업은 더디기만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넓은 체육관은 애타는 부모들의 분노와 절규로 가득 찼다. 그때 ‘지옥이 있다면, 아마 여기 같겠구나’ 생각했다.
골든 타임이 지나고,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자, 수백 명이 모여 있는 체육관은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침묵에 잠겼다. 아수라장일 때보다 더 무서웠다. 밖으로 나오면 바닥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며 울고 있는 가족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안타까운 시간만 흐르는 동안, 나는 매일 여기저기서 진행되는 브리핑 일정을 챙기고, 뉴스 시간에 맞춰 현장연결을 준비했다. 이후의 시간은 모두 다 알다시피 매일 바다에서 시신을 인양하고, 사망자 통계를 수정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돌이켜보면 세월호 현장에서 나를 지배했던 감정은 무력감과 자괴감이었다. 엄청난 비극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심지어 언론이 열심히 구조하고 있다는 정부의 발표를 받아 써서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비난도 엄청났다. 그저 죄인이 된 것 같았다. 그럼에도 재난 현장 취재는 기자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다.
진도에서 복귀한 이후,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한동안 배에 갇혀서 바다에 빠져 죽는 악몽을 자주 꾸긴 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 비하면, 내가 느끼는 불안과 괴로움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 자신을 외면해 버렸다. 그저 세월호와 관련된 일이면 자주 현장에 나가서 후속 보도를 하는 것으로 죄책감과 부채감을 조금이나마 덜어내려 했다.
시간이 흐르고 흐르면서 나는 그 기억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7년 후,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터져 나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태원 참사 속보를 접하고, 갑자기 숨이 턱 막히면서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을 때, 너무 무서웠다. 세월호라는 엄청난 사건을 겪고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안전하지 않다, 그래서 서울 한복판에서 백 명이 넘는 사람이 한꺼번에 죽는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때 나는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완전히 무너졌다. 가슴이 두근거려서 집 밖을 나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결국, 병원에 가서 온갖 종류의 심리검사와 (지금은 이름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뇌 기능 검사까지 받았다. 검사를 받으면서도 설마 뇌에 문제가 있을 리가 있겠나 싶었는데, 결과는 꽤 충격적이었다. 뇌가 지나치게 활동하면 붉은색, 평균은 연두색, 활발하게 활동하지 않으면 푸른색을 띠는데, 나의 결과지는 대체로 푸릇푸릇했다.
검사 결과뿐만 아니라 실제 일상에서도 한동안 바보가 된 것처럼 돌아서면 까먹고 (만날 때 명함을 준 사람에게 헤어질 때 다시 명함을 주는 일도 있었다), 평소라면 동시에 처리 가능한 일들도 버벅거리기 일쑤였다. 전체적인 기능이 다운그레이드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다 보니 반강제로 세상만사에 무리하지 않고, 나 자신부터 돌보지 않을 수 없었다. 처방받은 약을 잘 챙겨 먹고, 심리상담도 받으면서 안정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주위에도 그냥 나 지금 아프다고 적극적으로 말하고 다녔다. 겉으로만 봐서는 알 수가 없으니, 평소와는 다른 내 상태를 이해시키려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무거운 주제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말 꺼내는 게 어려웠지만, 자꾸 하다 보니 점점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집에서는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러놓고 ‘어우! 내 정신 좀 봐. 나 요새 머리가 잘 안 돌아가서 그런가 봐’ 하면 남편은 웃고 넘어가기도 했다.
그렇게 몇 개월쯤 지나니 다시 살만해졌다. 100%까진 아니지만 90% 정도 복구가 됐다는 느낌이 들자, ‘병원을 언제까지 다녀야 하나’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완치(?)에 대한 환상과 기대가 있었나 보다. 이제 좀 괜찮아진 것 같긴 한데, 정말 괜찮은 게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 고민하던 시기에 명상선생님과 저녁을 먹으면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날 선생님은 내게 꼭 필요한 조언을 해주셨는데, 그 한마디로 완치를 꿈꾸던 헛된 희망을 바로 접을 수 있었다. 선생님의 조언을 요약해 보면 이렇다. 완치는 무슨....(어이없는 웃음) 그냥 평생 안고 가는 거야. 그 일 이전으로 다신 돌아갈 수 없어. 지금은 괜찮다 싶어도 언제든 다시 찾아오지. 그렇다고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럴 때마다 나 자신을 잘 돌봐주면 돼. 외면해버리지 않고, 따뜻하게 안아주고, 보살펴주면 돼.
그날 이후로 올해 4월이 되기 전까지, 나는 무탈하게 잘 지냈다. 하지만 올해 봄은 쉽게 넘기기 어려웠다.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아 가족협의회에서 펴낸 공식기록집을 읽다가 갑자기 모든 것이 어제 일처럼 너무 선명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밤새 울었던 그날 밤, 나는 다시 한번 위기가 찾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선생님의 조언대로 한동안 무리하지 않고, 나를 돌보는 데 집중했다. 나는 왜 아직도 이럴까 자책하는 대신, 올 게 왔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잘 보살폈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참고 견디며 했을 일도 이번에는 바로 손을 뗐다. 대신 다른 일에 집중하면서, 잘 먹고, 잘 자고, 약도 챙겨 먹었다.
덕분에 무사히 한 고비를 넘겼지만,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걸 안다.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위기는 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래도 예전만큼 불안하거나 두렵지 않다. 내가 나를 외면하지 않는 한, 나는 괜찮을 거라고 믿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