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평변호사칼럼
송나라(북송) 시절 시인, 학자, 정치인으로 구양수(1007년~1072년)라는 사람이 학문을 하는 자세에 대해 다독, 다작, 다상량이라고 말한데에서 유래해 '삼다'로 불리게 되었다.
다독은 말 그대로 많이 읽는 것이고, 다작은 말 그대로 많이 쓰는 것이다. 그런데, 다상량은 많이 생각한다는 의미이기는 하지만, 정확하게 해석하면 '많이 헤아린다'는 의미이다.
공부를 잘 하는 방법에 왕도가 없듯이 글을 쓰는 것에도 왕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해야 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도는 없음을 요약한 것이다.
무엇보다 쓰기 시작해야 한다
일기든 편지든, 메일이든 SNS든 무조건 쓰기 시작해야 한다. 말과 달리 글은 주어가 있고 서술어가 있어 일정한 형식 내에 자신이 표출하고자 하는 생각의 편린을 정리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일단 표현을 밖으로 내 보내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작가란 별도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다
직접 해 보지 않고서는 누구도, 나 자신도 내 안의 능력이 어떠한지를 알 수 없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글을 쓰겠어"라고 생각을 하게 되면 결국 글을 쓸 수 없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고, 내가 규정하고 확립한 '자신'에 갇혀 변화를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글을 쓰는 것이 득점을 위한 것이거나 상품을 얻기 위한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잘 선보이기 위해서 쓰는 것도 아닌만큼 생각을 정리해서 '쓰기시작'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작가가 권위를 가지고 있으면 독자가 비판적 사고없이 읽어 주기는 한다
교수, 박사, 저명인사 등이 쓴 글은 사실 많이 구독당한다. 그리고, 독자는 그 글이 사실인지 검증하려는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먹고 살기 바쁘고 시간도 없기 때문에 글의 진정성에 대한 의심없이 글 밖에 있는 '권위'를 신뢰해서 받아들이게 된다.
내가 적은 글은 '권위'가 없다. 그래서, 진정성에 승부를 걸 수 밖에 없고, 검색되는 경험과 사고에 의한 것이 아닌 고유한 경험과 사고를 글로 적는 것이야 말로 시간이 지나면 공감을 형성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어릴적 적었던 일기나 연애할 때 주고 받았던 편지를 우연히 꺼내 읽은 적이 있는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어떻게 이런 걸 '내'가 적었지'라는 생각을 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같은 경험은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고, 그 글이 누군가에게 공감을 주고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다.
언젠가 내 글은 누군가에게 도달하게 된다
유리병에 편지를 담아 바다에 띄우는 장면을 생각해 보자. 불특정 다수가 아닌 불특정 일인에게 그 글은 전달되게 되어 있다. 물론, 유리병의 내구력이 염분의 부식력을 견뎌 내는 시간 내에 누군가에게 도달되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하지만, 지금은 인터넷이 숟가락, 젓가락처럼 생활의 일부이기 때문에 내가 적은 글은 불특정 다수에게 전달되기 마련이다. 성심껏 적어내린 내 글을 여럿이서 볼 수 밖에 없고, 그 중 하나라도 진심으로 나의 메세지를 수용해 준다면 작가란 별단의 인물이 아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