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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평변호사 Sep 11. 2017

아버지를 업는 꿈

일상의 변론

힘이 없다는 아버지를 업고서 몇 시간 동안 걸어다니는 꿈을 꾸었다. 잠결에 얼마나 몸에 힘을 주었던지 사지가 뻐근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아버지가 무능력, 나태로 우리 가족을 경제적 빈곤상태에 빠지게 만들었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해서는 애증이 대부분이다. 생각하면 답답함이 앞선다. 


아버지를 업고 다닌 이 꿈을 왜 꾸게 되었을까.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리움이 만든 것일까. 아니면 잡몽일까.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나 서운함이 살을 맞닿는 장면으로 꿈에서라도 해피하게 그려진 것일까.


아버지가 되고 보니 아이들을 상당히 자주 안거나 업는다. 그일에 체력이 상당히 소진됨에도 불구하고 힘겹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나의 아버지를 업어 본 적이 없다. 뚜렷한 이유없이 아버지의 몸에 접촉하는 것은 불편했다. 게다가 업을 만큼 아버지가 노약해지기 이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럴 기회조차 가지지 못 했다는 것도 아버지를 업어 본 적이 없는 이유이다. 


지금도 나의 아버지는 나에 대해 잘 알지 못 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나 역시 아버지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아버지와 아들은 보이는 것 이상으로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려는 노력에 대해 인색한 관계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두 아이의 아버지로 살아가면서 아버지로서의 삶이 녹녹하지 않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나의 아버지도 그런 고통과 무게를 짊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어렴풋 이해할 수는 있겠지만, 역할이 대체되지 않고서는 결코 공감할 수 없는 고통과 무게이다. 


지금 아버지가 곁에 살아계신다면 미움과 원망을 뒤로하고 한번쯤 업어드릴 수 있을 듯 하다. 하지만, 그럴 기회는 절대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단지 꿈 속에서 아버지를 업어볼 뿐이다. 나의 다리로 그의 다리를 쉬게 하였다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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