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변론
파괴적 기술, 창조적 파괴와 같은 표현은 다분히 미화적이고, 불안에 대한 진통제같은 암시다. 특정한 기술이 출현해서 사회를 극변하게 만들때, 혁명이라는 표현을 덧붙인다. 그리고, 예상치 못 했던 변화에 대한 수습이 정치, 경제, 사회적 집단이 집중적으로 하는 일이다.
AI, 로봇 등이 사람을 대체하는 일은 예상보다 가까운 시일 내에 실현될 것이다. 그리고, 그 출현에 대한 예측은 두가지이다. 인간은 많은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는 것과, 기존의 일자리는 없어지지만 새로운 일자리가 생길 것이라는 두가지 예측이 그것이다.
증기기관이, 기계가 출현했을 때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기계를 부시려고 했다. 러다이트같은 운동이 그것이다.
2만평이 넘는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1명인 미래가 온다. 그리고, 개 한마리가 필요하다. 그 1명이 졸때 깨울 수 있도록 짓는 개가 필요하다. 수천명, 수만명이 실직하게 되는 상황이 온다.
인터넷이 상용화되어 그와 관련된 일자리가 발생했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이 많은 일자리를 파괴한 것은 사실이고 새로운 일자리를 발생시켰을지라도 그 일자리의 수나 질은 감소했다. 그것은 데이터적인 분석이 아니라더라도 누구나 직감하는 사실이다.
AI, 로봇이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은 '적당히, 대강, 즉흥적,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직감에 의한' 그런 영역일 것이다. 요리강습을 하면서 소금을 적당히, 된장을 적당히 섞으면 된다라고 하면 그것을 직감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요리를 잘 할 수 있게 되지만, 그게 무슨 말인지 느낄 수 없는 사람은 '적당히'는 아무런 가르침이 없는 것과 같다.
분명한 것은 AI, 로봇 등이 상용화되면 인간의 가치와 역할이 가중치에 있어 감소된 그 무엇인가로 축소될 것은 명백하다.
나는 기술의 발전을 디스토피아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에 속한 유형에 속한다. 지금의 삶도 큰 불편이 없는데, 좀더 정확하고 빠른 계산기가 필요하지 않은데, 굳이 그런 계산기를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에 빠진다.
우매하고 평범한 우리네 같은 사람들은 현재도 좋은데, 그리고 큰 불만이 없는데, 소위 똑똑한 놈들이 자꾸 자극하고 어떤 상품을 사라고 자극하고, 누구에게 투표를 해야 한다고 호도한다.
보통의 사람들은 크게 욕심이 없다. 그리고, 크게 죄를 짓지 않는다. 그 반대의 짓을 하는 것은 욕심많은 인간들과, 축적에 대한 욕구가 강한 부류의 인간들이 우매한 인간들을 이용하려고 하는 속셈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우매하고 보통이 사람이다. 때문에 새로운 기술을 돈 주고 사면서도 새로운 기술이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