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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평변호사 Jun 11. 2016

왜 내가 받은 고통만 기억하는가

윤소평변호사

감기걸린 사람곁에 있다가 감기가 옮으면 자체 역학조사를 통해 누구로부터 감기가 옮았는지 알게 되더라도 그 해당 감기 보균자를 상대로 치료비를 내 놓으라거나 전염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지는 않는다. 며칠 앓아 눕다 잊어버린다.      


자신이 감기에 걸려서 타인에게 감기바이러스를 옮기더라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 할 뿐 아니라 같은 이유에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감기바이러스를 나누어 주었는지 관심조차 가지지 못 한다.     


분명 감기바이러스를 전염받았을 때 고통받는 것은 자신임에도 그 고통은 금새 잊어버리고, 고통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치유될 것을 알고 있고, 원망해도 소용없으며, 감당할 수 없는 고통만이 고통으로 기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관계를 유지하는 한 고통을 서로 주고 받게 되어 있다.     


사회적 존재로서 타인과의 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지만, 어떤 관계는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어떤 관계는 단절되기도 한다.      


그런데, 어떤 관계에서는 내가 타인에게 고통을 주기도 하지만, 어떤 관계에서는 나만 고통을 받는다고 여긴다. 또, 어떤 관계에서는 고통을 주고 받는다.      


하지만, 어떤 관계에서든 기억은, 나만 고통받은 것으로 남아있다. 그렇다면, 왜 내가 받은 고통만 기억하는 것인가.     


분명 팩트(fact)는 하나인데, 해석에 있어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를 더 사랑한다. ‘나 보다 더 너를 사랑해’라고 고백하는 순간에도 사실은 자신을 더 사랑한다. 100을 주었으니 그 이상을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환되는 것이 100이하일 경우에는 고통을 받는다.      


최소한 자기가 사랑하고 배려하는 수준에 준하여 상대가 리턴해 주기를 바램하지만, 좀처럼 그같은 결과는 경험하지 못 하는 경우가 더 많다.      


관계속에서 실은 타인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사실에 대한 해석을 자기중심적으로 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이고 해석과 결과 사이의 간격만큼을 고통의 크기로 느끼게 된다.      




수많은 관계 중에 타인과 자신이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고 자부할 수 있는 관계유형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지위에 있어 차이를 보이는데, 어떤 관계에서는 자신이 늘 약세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우 관계 속에서의 피드백은 좀처럼 기능하지 못 하게 되고, 자신이 규정한 관계의 개념 속에 자신을 가두게 되고, 실제 규정한 바대로 자신은 점점 형성되어 간다.      


실제 타인이 고통을 준 사실이 없는데도, 관계의 역학상 열세라고 느끼게 되면 고통을 느낀다는 착각까지 발생한다. 줄곧 고통뿐이라고 기억되는 이유는 관계를 맺을 때부터 예견된 것이다.      


자신이 타인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존재임에도 결코 자신은 타인에게 고통을 줄 수 없는 지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만 고통받은 것으로 기억하게 된다.     





타인이 요구하거나 원하지 않음에도 일방적인 관심과 호의를 기울이는 경우가 많다. 그 동기가 관계의 진전이거나 유지라는 선한 목적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타인으로부터 보상이 주어지길 기대하는 순간부터 상처와 고통의 진통이 시작된다.


타인으로부터 받고자 하는 보상의 크기는, 자신이 베푼 관심과 호의보다 작은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아쉬워하며 자신의 호의와 타인으로부터 보상을 비교하면 고통을 겪는다.


문제는 타인이 보상을 해야 하는지 조차 인식하지 못 한 경우에는 보상을 전혀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관계에서 자신만이 고통을 받았다고 기억하게 된다.


상대가 채식주의자인데, 비싼 소고기를 열심히 공급하는 것이 자신이 생각한 최선이라고 여겼을 경우, 상대는 그 호의에 대한 보상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일방적인 관심과 호의에 대한 왜곡된 보상심리는 일방적으로 자신만이 고통을 겪었다고 느끼게 만든다.


관계가 형성되고 유지되는데에는 상당한 노력과 지속적인 정성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관계는 불화를 겪을 수 있고, 그 불화를 극복해서 더욱 공고한 관계로 거듭날수도 있지만, 관계가 깨어지는 경우도 많다.


관계가 불화의 단계에 접어들어 파탄의 지경에 이르면, 자신만이 참고 인내하였다고 생각하고, 관계불화의 주된 책임과 원인은 상대에게 있으며, 자신은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편이 속편하고 합리적이라고 여긴다.


자신을 약자로 분류하면 관계불화의 책임범위에서 다소 멀어질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은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위로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다. 때문에 자신만이 고통을 겪었고, 그 고통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된다.





가치관, 세계관이라는 개념을 차용하지 않더라도 하나의 사실에 대해서 저마다의 해석체계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단일 사실에 대한 해석과 수용은 큰 차이를 보인다.


일반적으로 사실에 대한 해석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기 마련인데, 해석의 차이를 좁혀 나갈 수 있다면 관계가 지속될 수 있겠지만, 모순되거나 상반된 해석의 수용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는 대화와 합의를 하지 않는 이상, 상호간에 고통이 야기될 수 있다.


특정한 사건과 계기에 대한 왜곡된 해석은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고, 그 과정에서 자신은 고통받을 수 밖에 없었다고 여기게 만든다.


사건과 사실에 대한 객관적인 해석은 정해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일 수 있음에도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과정이나 약간의 피학적인 해석으로 인해 갈등의 계기를 스스로 만들어 내고, 자신만이 받지 않아도 될 고통을 받게 된 것이라고 기억하게 만든다.




누구든지 자신에 대해 오해를 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오해에 대해 일일이 해명할 의무는 없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자신에 대한 외부의 시각에 대해 약간의 착각을 하는 것이 정신적 건강에 바람직할 수 있다. 상대가 자신을 그렇게 나쁘게 바라보지는 않을 것이라는 수준의 착각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자기방어와 보호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 본능이기 때문에 의식적인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그러한 입장에서 사고편향이 생기기 마련이다.


상대에게 자신이 고통을 주었다고 지속적으로 생각하면 죄책감이 되었든, 미안함이 되었든, 자신이 피해자라고 여길 때보다 더 견디기 힘들어진다. 오히려 상대를 가해자로, 자신을 피해자로 분류하는 것이 심적 안정측면에서는 이롭다.


자신을 이렇게 보호하고자 하면서 자신만이 고통받았고 그 고통을 기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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