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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평변호사 May 13. 2019

타인의 잘못으로 깨질 때

일상의 변론

"김 대리! 이리 와 봐! 일을 이 따위로 할거야!"


김 대리는 부장에게 불려가 엄청 깨졌다. 거래처에 보내야 할 서류가 잘못 송부된 것이다. 하지만, 그 업무는 김 대리 소관이 아니라 박 주임 업무이다. 이미 몇달전부터 업무에 관한 인수인계는 끝난 상황이었다. 부장은 여전히 김 대리 업무로 인식하고 있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김 대리가 박 주임을 제대로 교육하지 않아서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의 잘못이 아닌데 질책을 받는 경우!

내 잘못이 아님에도 누군가로부터 질책을 받고 깨지게 되는 상황만큼 짜증나고 화가 나는 경우도 많지 않을 것이다. 분노, 모멸, 억울이 머리를 가득 채운다. 질타의 소리는 몇마디씩 들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결과의 원칙적 책임자에 대한 복수와 책임추궁에 대한 계획이 저절로 수립된다. 


사장은 거래처로부터, 사장은 부장에게, 부장은 김 대리에게, 김 대리는 박 주임에게 사슬처럼 추궁과 질책이 바톤으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박 주임이 책임을 인정하고 감내하면 마침표다. 하지만, 박 주임이 김 대리로부터 제대로 인수인계를 받지 못 했다고 느끼면서 억울한 감정을 품는 순간, 순환은 종료되지 않는다. 


매끄럽지 못 한 일의 결과는 가시적으로 발생했지만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려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다. 외관상 공통 공간에서 외관상 친절한 기색을 보이지만, 각자의 마음 속에는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 


일의 체계가 아닌 감정의 톱니바퀴 속!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은 모호한 구석이 있다. 때로는 그 모호함이 인간적이라고 받아들여져 좋은 관계로 평가받을 때도 있지만, 책임을 따질 때 모호함은 항상 문제를 야기한다. 타인의 잘못으로 인해 자신이 깨지는 순간은 모호함이 억울한 상황을 연출하는 타이밍이다. 물론, 모호함에 대한 책임까지 묻는다면 더 이상 이야기가 전개될 수 없다. 


맡은 업무 자체에 대한 결과책임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관리책임까지 첨가해서 질타한다면 억울함을 떠나 지위가 낮고 힘이 없는 자신의 신세를 타령할 수 밖에 없다. 언젠가 내가 저 자리에 앉는다면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해 보지만, 그 자리에 앉을 때 쯤이면 까맣게 잊어버릴 각오이다. 


관계적 책임!

어느 국가, 사회에나 관계를 맺는 순간 일정한 책임을 부담해야 하는 계약들이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동양사회, 특히 우리나라는 관계책임이라는 것이 상당 수준 발달되어 있다. 사장은 직원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진다. 상사는 부하 직원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진다. 부모는 미성년자녀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진다. 아르바이트생의 잘못 또한 사장의 책임이다. 


관계는 계약 또는 계약 이외로 설정되지만, 어느 경우나 명백하게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타인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만든다. 만연한 결과가 당연히 받아들여져 학습되고 전수되는 바람에 타인의 잘못으로 자신이 깨지는 경우를 당하게 된다. 그 결과 타인 탓을 하는 게 고작이다. 잘못의 책임자를 색출해 내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에 대한 위로는 드물다. 정정은 없다. 가능하다면 진범을 쫓아내고 싶지만 그럴 권한도 없고 그럴 용기도 없다. 


아무런 관계가 없고, 내막도 모르는 제3자에게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는 것으로 일단락되는 경우가 많다. 관계란 그런 것이고, 사회생활이란 것이 그런 억울함도 견디는 것이라는 충고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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