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변론
품안에 자식이다. 누구나, 나 역시 부모를 일정 부분 거스른다. 그 시기가 빠를수도 있고, 늦을수도 있고, 아닌 척 할 수도 있다. 부모님은 참 잔소리가 많고, 쓰잘 데 없는 것에 신경을 쓴다. '내가 다 알아서 할텐데'. 우리는 그렇다. 자식은 그렇다. 신세대의 사고는 항상 구세대를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하는 구석이 있다.
반복이다. 삶은!
인생을 다시 산다는 느낌과 인식을 받을 때, 그 순간은 자식에게서 나를 닮은 구석을 발견할 때이다. DNA가 그런 것인지, 후천적 학습과 모방 때문에 그런 것인지 자식은 부모를 닮은 짓을 한다. 그것이 장점일 경우에는 다행이나, 치부일 때는 화가 난다. 아니 화를 낸다.
스스로가 어떻게 개선할 수 없는 행위나 습관을 자식이 답습할 때, 해답을 찾아내 알려달라고 하기에는 손이 부끄러워서 아예 그런 갈등으로 진입하는 것을 차단하고 싶다. "그건 아니야! 하면 안돼!". 잔소리, 쓰잘 데 없는 말을 하게 된다. 기억은 순환된다. 분명 내가 부모를 향해 마음 속으로 외쳤던 그 소리를 직접 외적으로 소리를 내서 하게 된다. 안된다고 하는 말이 듣기 싫었지만, 이제는 "안돼"라는 말을 더 많이 하게 된다.
정답만 알려 주고 싶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인생을 진지하고 무겁게 받아들이게 되는 계기는 부모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 이전에는 쉽게 포기하거나 쉽게 희망을 품는 일 따위가 너무나 간편했는데, 부모가 되면 삶이 진지해 진다. 세상에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것, 솔로몬보다 더한 지혜를 전수해 주고 싶은 심정이 든다. 사실 솔로몬이 될 수 없음에도 마음만은 그렇다.
가끔 아이들을 보면 나 자신이 그 또래였을 때보다 참으로 똑똑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 자신보다 더 열심히, 바쁜 커리큘럼을 소화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진화론이라는 것이 일정 부분 옳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부모가 생각하는 정답은 아이들에게 정답이 아니다. 대체로 옳기는 하지만, 시의적절성이 뒤쳐지기 때문에 본질적인 면에서 수긍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인 방법과 실천에 있어서는 시대와 문화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들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부모는 사실을 간과한채 결핍과 열등, 후회와 미련에 근거해 자녀들에게 버거운 숙제를 내려고 한다.
함께 살아가는 개별 구체적인 삶!
인간은 20개월의 임신기간을 지나는 듯 하다. 어머니의 배 속에서 10개월, 분리되어 배출되고 나서 10개월이 지나야 걷기도 하고, 최소한 사물을 식별하기도 한다. 2달더 보태면 돌잔치를 할 수 있다.
동물들, 특히 대부분의 포유류들의 새끼들이 포태하자마자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것과 달리 인간은 참으로 오랜 기간 부모의 손이 많이 간다. 부모는 자식에게 많은 것을 다운로드해 주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대부분 부모의 욕심이고, 주관적인 후회의 회복을 위한 몸부림일 뿐이다.
자식은 내가 낳았지만, 내 것이 아니다. 내가 키우지만, 스스로 커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러했듯이 부모의 존재감이 인간이라는 개체로서의 성숙이 될수록 점차 감소한다. 부모는 아이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 추억을 남기는 것이다. 기억을 남기는 것이다. 그것이 아름답고 실속있는 것일수록 부모로서 가점이 있는 인생을 산 것이다.
추억을 쌓는 시간을 최대한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속에서 아이들이 자체 판단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러 저러한 부모가 있었구나'. 그것으로 부모의 역할은 다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