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변론
세상을 납득하는 몇가지 방법이 있다. 감정적 수용, 이성적 설득, 영적 감응. 사람, 말, 현상, 사건, 자연의 변화, 인간의 심리, 물리적 법칙, 수학, 인과관계 등 상황에 따라 감정, 이성, 영감 등을 선택하거나 혼합해서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려고 한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그저 받아들일 수 밖에 없지만, 최소한 감정적 순응이나 터치가 있다면 그러한 모든 것들을 일부라도 수용할 수 있다. 혜량(惠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 중, 사람들 중 일부에 대해 깊이 살펴서 이해하려고 애를 써야 하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세상에 대해, 누군가에 대해 나를 깊이 살펴 이해해 주기를 바랄 때도 있다. 그럴때 '혜량'이라는 말을 쓴다. 물론, 이 말을 처음듣거나 몰랐던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변호사들 중 한자공부를 해야만 했던 시기에 학창시절을 겪은 세대들은 이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판사에게 해당 피고인의 죄에 대해 처벌을 판단할 때 깊이 헤아려 살펴달라고 품위있고 있어 보이게 표현하는 것이다.
혜량해 달라고 겸손섞인 표현을 사용할 때는 대부분 필요가 절실하거나 요구가 반드시 관철되어야 하거나 몹쓸 짓을 하여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경우들이다.
'신이시여! 이 못난 어린 양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제 잘못은 용서해 주시고, 제 바램은 가급적 이루어지게 해 주시옵소서!'
사람이 잘못된 행위를 하거나 이익을 얻기 위해 양심을 져버린 후에도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필요한 때에 겸손해지는 것은 본능적이라고 해야 할까. 누군가를 몹시 싫어하지만, 욕구충족에 반드시 필요한 대상이라면 한없이 자세를 낮추는 것은 겸양의 본능일까. 잘못은 과거이고, 욕구는 미래이기 때문에 비교대상이 될 수 없으니 부디 반성하고 개선될 나의 미래만 보아 달라고, 그리고 가급적 최대한 깊이 살펴 이해해 달라고 간곡해지는 것은 내적 깊이나 지적 수준과는 관계없는 내재된 본성일까.
아이러니한 것이 과거, 역사로부터 배울 것은 있어도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 줄 것은 없다. 우리의 지식과 앎은 지금의 젊은이와 아이들에게 전혀 쓸모가 없는 것들이다. 세상이 요구하는 지식과 기술에 대해 우리는 아는 것이 없고, 후세들에게 전달할 지식이란 더 이상 우리에게 있지 않고 다른 매체와 기술집중적인 제품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젊은이와 아이들에게 더 이상 가르쳐 줄 것이 남아있지 않단 말인가. 그 또한 아니다. 비록 전수할 지식은 미래에 쓸모가 없겠으나, 우리의 사고과정, 결정, 행동방식은 후세들의 눈으로 목격하고 있기 때문에 가급적 올바른 것, 다수를 위하고 이웃을 도울 수 있는 방향을 지향해야 한다. 코딩, 알고리즘, 블록체인 등 갖가지 신기술에 대해 문외한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가르칠 것은 없지만, 인생이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결정하며 이웃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칠 수 있다.
부모로써, 기성의 어른으로써 젊은이와 아이들에게 참으로 부끄러운 행동결정과 소모적인 투쟁의 모습을 보이느라 어떻게 힘들어 하고 무엇을 고민하는지에 대해 혜량하지 못해서 미안할 뿐이다. 스스로 밖에 모르는 어른들이 지식은 물론 삶의 도덕적 가치와 협력,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이유와 가치에 대해 가르쳐 줄 것이 없다면 우리는 사과해야 하지 않을까. 그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