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평변호사
#1 아르바이트
나는 1997년 여름경 군입대를 앞두고 휴학상태였다. 친구의 소개로 삼성라이온즈 어린이회원 모집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대구에 있는 초등학교 어린이라면 당시에 대부분이 삼성라이온즈 어린이회원에 가입을 했고, 회원에게 지급하는 야구점퍼를 입고 다녔다.
나는 단순히 회원모집만 하는게 아니라 야구선수들의 사인볼, 사인배트, 글로브, 헬멧, 악세사리 등도 판매하는 일을 했다.
#2 양준혁 선수의 사인이 새겨진 알루미늄 야구배트
어린이회원 모집 브로마이드에는 양준혁이 귀여운 사내아이를 들고 찍는 포즈가 새겨져 있었다. 당시 양준혁이 이승엽보다는 선배로서 성적이 더 좋았던 모양이다.
판매용 알루미늄 야구배트에는 양준혁 사인만이 있었던 걸 보면 내 짐작이 들어맞는 듯 하다. 이승엽 선수의 사인이 들어간 배트는 제작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승엽 선수와 나는 동갑이다. 중학교 시절에는 이승엽을 잘 몰랐다. 이승엽은 원래 투수였으나 타자로 전향한 선수이다.
#3 매일 야구장을 방문하는 중년의 남자
어린이회원 모집기간이 한 달 정도여서 나는 매일같이 야구장으로 출근을 해야 했는데, 경기가 있는 날이면 늘 야구용품 판매대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중년의 남자는 내게 양준혁 알루미늄 배트를 가리키며 "이거 많이 팔리나요?"라고 몇 번 물어본 적이 있고, 그 때마다 "아주 잘 나갑니다"라고 대답을 했으나, 정작 그 배트를 그에게 팔지는 못 했다.
내게 판매의욕이 없어 보이는 것인가, 아니면 중년의 남자로 하여금 구매의욕을 불러일으키지 못 하는 것인가를 두고 고민한 끝에 그가 다시 나타난다면 꼭 배트를 팔아야 겠다고 다짐했다.
원정경기가 있는 날, 어김없이 중년의 남자는 야구용품 판매대쪽으로 와서 내게 말을 건넨다. 또, 양준혁 알루미늄 배트를 가리키며 내게 말을 건넸다.
중년의 남자 : 이거 많이 팔렸어요?
나 : 인기가 좋습니다, 하나 사시죠!
알루미늄 배트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빛이 반사되어 중년의 남자가 눈살을 찌푸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설명했다.
중년의 남자 : 우리 아가 대학생이라 필요가 없어
나 : 조카 주셔도 좋아할 겁니다. 하나 사 주세요
중년의 남자 : 허허, 필요가 없는데
나는 중년의 남자가 구매의사가 없다는 걸 알았지만 집요하게 말을 걸어가면서 기념품이니 소장가치가 있다고 설명하고, 한정품이라는 거짓말까지 했다. 하지만, 그날도 중년의 남자는 그 배트를 사지 않았다.
#4 삼성직원의 조언
아르바이트생을 관리하고 회원모집 명단과 각종 판매용품을 관리하는 삼성직원이 나에게 그 중년의 남자에게 양준혁 알루미늄 배트를 더 이상 팔려고 하지 마라는 말을 들었다. 묘한 승부욕을 불러일으키는 중년의 남자에게 아르바이트 기간 내에 배트를 꼭 팔겠다는 결심을 한 후라 삼성직원의 말은 의문을 품게 했다.
삼성직원 : 그 남자가 누군지 아느냐?
나 : 아뇨
삼성직원 : 이승엽 선수 아버지셔. 그런데, 니가 자꾸 양준혁 배트를 사라고 하니 기분이 좋겠냐
나 : 아~
나는 이승엽 선수 아버지에게 양준혁 배트를 판매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니 이승엽 선수 아버지는 양준혁 알루미늄 배트의 판매현황만 물어본 것 같지는 않고, 이승엽 선수 사인이 들어간 야구공, 다른 기념품의 판매현황도 내게 물었던 것 같다.
사실 야구용품 중에서 배트가 가장 많이 팔렸던 것 같은데, 이승엽 선수 아버지가 양준혁 배트를 들고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이 배트에 승엽이 사인이 들어가면 더 잘 팔릴텐데'. 이런 생각을 하셨을까.
#5 여러가지 해소된 의문들
중년의 남자가 원정경기가 있는 날마다 야구장을 방문한 사정, 야구용품 판매대를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던 사정, 판매원인 내게 이것저것 물어본 이유 등 그에게 품었던 궁금증들이 한꺼번에 해소가 되었다.
이승엽 선수의 아버지는 아들의 경기가 있는 날마다 관중에 섞여 아들의 경기를 지켜보았고, 응원을 했다. 그같은 아버지의 존재가 있었으니 이승엽 선수가 국민타자가 될 수 있었고, 스캔들 하나없는 정숙한 선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승엽 선수와 동갑이어서일까. 그가 은퇴한다면 왠지 더 서글퍼질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