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Any essay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소평변호사 Dec 26. 2019

포용없는 정치, 포용없는 경제

일상의 변론

1인당 국민소득 3만 3,000달러, 1인당 국민소득 1,800달러


전자는 남한의 1인당 국민소득이고, 후자는 북한의 국민소득이다. 우리나라는 6. 25. 이후 1인당 국민소득이 500배 이상 증가했다.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임을 긍지로 살아왔다. 그런데, 과연 그 긍지가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매우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빨갱이', '좌파', '좌파정권'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우리사회의 일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된 것은 자주적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강대국들의 편의와 이해타산의 결과라는 매우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것이긴 하였지만, 역사적 증명과정에서 공산주의-사회주의는 자본주의-민주주의에 패배한 것은 실증적인 사실이다. 마르크스에 의해 자본주의가 자체적으로 붕괴해서 공산주의-사회주의로 될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결과의 도출은 희박해 보인다.


북한은 왜 저렇게 못 살게 되었을까

잘살고 못살고의 기준은 기준선택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체로 인간의 성취욕에 대한 보상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국가나 조직, 사회가 대체로 잘 살 가능성이 높다. 노력하면 돈을 더 벌 수 있고, 지위가 상승할 수도 있으며 개인의 인격과 재능에 대한 존중이 회답되는 국가, 사회에는 발전이 있을 수 밖에 없고 잘 살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북한의 경우에는 일단 정치적 착취와 더불어 경제적 착취가 쌍두마차로 구르기 시작했다. 북한주민들에게 선거권, 피선거권, 여론형성의 자유는 보장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유재산이 인정되지 않아 대다수 굶주리는 반면 윗대가리들만 뚱뚱해져 버렸다. 정치와 경제의 착취가 인간의 이니쉬티브를 잠재워 버렸기 때문이다


중국은 정치적 착취는 여전하지만 경제적 착취면에서 일정한 포용을 실시했다. 그래서 비약적인 경제적 발전을 실현했다. 다만, 그 체제가 언제까지 유효할지는 모를 일이다. 기본이론에 없는 정치경제체제가 중국의 실상이다. 많은 이론가들이 중국의 국체와 경제형태에 대해 제3의 형태라고 인정하는 것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남한은 왜 잘 살게 되었을까


우리나라는 경제적 착취를 버리고 자본주의를 수용해서 기업과 개인의 경제적 활동에 대해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것을 보장했다. 노력에 대한 보상을 보장해 주기 시작하자 기적이 한강에서 일어났고,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를 초과하는 선진국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다.


하지만, 정치적인 면에서 포용없이 착취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돌맹이와 최루탄의 대결이 있었고, 민주화라는 것이 독재를 밀어내자 정치적 착취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경제적 번영이 현재까지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정치적 착취를 버리고 정치적 포용으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끝까지 잘 살 수 있을까

정치적 포용없이는 경제적 번영이 지속될 수 없기도 하고 번영을 맛 볼 수 없음을 역사적 교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착취경제에서는 착취정치가 어울리기 때문에 사는 것도 어렵고 표현하는 것도 어렵다. 못 사는 국가들을 보면, 정치적 포용은 물론이고 경제적 포용도 없다.


중국이 특이하게 정치적 착취를 지탱하면서도 경제적 번영을 선보이고 있는데 그 지속성에 대해서는 의문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끝까지 잘 살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물음표를 던져 보아야 한다.


외관상 경제적 포용과 정치적 포용이 인정되는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정치적 착취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포용의 의미를 망각하고 있고, 경제적 착취까지는 아니어도 포용을 망각해 가는 듯 하다. 정당한 부자는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인센티브에 대한 확신이 선다. 부당한 부자들에 대한 선별적 착취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유는 포용제도라는 옷을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입고는 있지만, 그 속에서 위정자들이 내심으로 착취를 하려고 하는 듯 하다. 직접 물어볼 수는 없으나 포용의 대상은 국민이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포용의 대상은 대립각을 내세우는 다툼의 대상이지 자기네 사람들이 아니다. 나라를 걱정하고 위하는 마음과 방법은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다르다고 해서 적으로 간주하여서는 안된다. 협치주장은 늘 하는데, 그 말인즉슨 포용이다.


정치적 포용과 경제적 포용없이는 지금 잘 살고 있는 이러한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재판 X랄같이 하는 변호사 #4 전문성의 결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