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변론
독립은 중립과는 구별해야 한다. 독립은 예속되거나 의존적이지 않은 상태를 의미하고, 중립은 일편으로 치우치지 않고 공정한 처신을 유지하려는 상태이다. 독립이나 중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적 의지도 필요하지만, 외적 영향을 변수로 넣지 않으면 안된다.
독립은 일제 식민지 하에는 그 개념이 명백했다. 그리고, 삼권분립의 헌정체제가 수립되면서 사법부의 독립 또한 명백한 개념으로 명확하다. 하지만, 정치적인 문제나 사회적인 문제에 있어서 독립의 영역이 아니라 중립의 영역에 속한다고 보아야 한다.
아들과 딸이 서로의 이익을 두고 싸운다. 이럴 때 부모는 독립적일 수 없다. 중립적이거나 편향적일 수 밖에 없다. 편향적일 수 밖에 없다는 표현은 부모가 중립적으로 공정하게 결론지었다고 하더라도 아들과 딸 중 하나는 불만을 가진다는 점에서 편향적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지적해 두고 싶다.
양팔저울의 중심을 유지하는 지점을 지레라고 한다. 언제나 보수, 진보, 좌파, 우파 등 대립적 구도가 사회를 발전과 퇴보의 결과를 야기했다. 천칭의 지레가 다수였다면 보다 점진적인 발전을 지속적으로 이룩해 낼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추측이 사견이다.
중립을 지켜야 하는 명시적인 부류가 있다.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모든 경기에서 판단을 하는 심판의 중립은 공정한 게임의 기본적인 전제이고 필수요소이다. 그런데, 과연 중립을 유지할 수 있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고민이다. 좌우로 치우친 사유와 반론은 중립에서 기울어진 짝짝이 양팔저울의 모습을 보일 뿐이다.
중립을 유지하려면, 독립을 유지하려면 양편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야 한다. 그리고, 양편이 제시하는 숱한 증거를 꼼꼼히 점검해야 한다. 그저 떠도는 소문에 의해 중립과 독립은 유지될 수 없다. 나아가 중립과 중용을 실천하려면 나름의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스스로 양측의 입장을 고려해 나름의 증거를 수집해 보고, 그 결과를 검증해야 하고, 피곤한 노력을 기울여야만 중립같은 중립을 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을 기울여서 컨텐츠와 언론을 제시하는 노력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나는 지식이 깊지 않고, 덕도 얕은 인사이다. 다만, 세상을 편향된 관점에서 바라보는 맹점에 빠져들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이다. 하지만, 수집되는 정보의 한계, 개인적 성향에 따라 판단이 자꾸 편향된다. 자제하고 절제하고 싶다.
갑론을박이 민주주의의 본질이라고 하더라도 갑이 나쁘고 을이 옳은 것은 아니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어떤 천재라고 하더라도 최적의 답안지를 내놓지 못 한다는 논문이 있다. 인간은 항상 차선책을 내놓았고, 차선책을 선택해 왔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결국 수학적 합리의 극대화된 답이 선택된 적이 없다는 점이다.
다툼이 많은 세상이다. 누구는 누구를 가리켜 빨갱이라고 하고, 누구는 누구를 가리켜 꼰대이며 고인 물이라고 한다. 과연 같은 국적을 가지고 대부분 이 좁은 땅덩어리에 살면서 이런 식의 평가가 가능한 근거가 있을까. 전체적으로 중립은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와 노력이 필요하다. 유튜브의 한 패널이 재미가 있을지라도, 선호하는 언론이 구미에 맞더라도 그것을 다 빨아 흡수해서 나의 고유한 사유체계로 삼아서는 안된다. 위험한 일이다. 우리는 언제나 의심하고 탐구해야 하는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