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평변호사
# 주민등록번호
태어나면서 가장 먼저 '나'를 개념짓는 숫자는 주민등록번호이다. 주민등록번호는 13자리의 숫자로 구성되어 있다. 마지막 숫자는 '검증번호'이다. 생년월일을 포함한 앞 12개 숫자 모두를 특정한 공식에 대입해서 산출한다. 따라서 앞의 12자리 숫자가 차례로 정해지면, 마지막에 올 수 있는 번호는 딱 하나로 결정된다. 이를 'check digit'이라고 한다.
# 학번
어린이집, 유치원까지는 숫자로 분류된 반편성이 대부분 없다. 학교에 들어가면 숫자로 된 반편성이 대부분 이루어진다. 1학년 3반 15번. 키 순서가 되었든, 성명의 '가나다'순이 되었든, '나'는 상부 카테고리에서 분류되어 내려오는 하부 카테고리의 숫자를 부여받는다.
대학에 들어가면 뭉뚱그려 학번을 얘기하고, 구체적인 개인 학번까지는 기억도 하지 못 한다.
# 석차
학창시절 가장 예민하게 작용하는 숫자는 '나'에게 부여되는 석차이다. 석차는 분모가 정해져 있고(전학이 이루어지면 분모가 약간은 변동될 수 있다), 분자만이 내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영역이다.
석차는 분자 나누기 분모를 했을때 '0'에 가까울수록 바람직한 것이고, '1'에 가까울수록 괴로워진다.
# 수험번호(응시번호)
대학입학시험, 각종 고시, 운전면허 시험 등 수험번호는 적을 때는 부담없이 없지만, 결과를 확인할 때는 가장 절실하게 바라보게 되는 숫자이다. 수험번호를 부여받는 순간 그 숫자가 행운을 가져다 주기를 바라는데, 그 숫자는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다.
# 대기번호
면접을 보거나 은행창구를 방문하거나 맛집을 가거나 하면 대기번호를 받는다. 대기번호가 큰 숫자일 수록 시간이나 비용, 심리적인 소비 등 지출해야 하는 것들이 커진다. 대기번호가 클수록 원하는 것을 이루기가 어렵다.
# 사업자등록번호
사업자등록번호는 어떤 사업을 할 때 관할 세무서에 등록하면서 부여받는 숫자이다. 개업일시, 업태, 업종 등 개략적인 사항들이 기재되어 있다. 사업자등록번호가 주관적으로 기분좋은 숫자라고 여겨지더라도 매출과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 자산과 부채
고위 공직자들이나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자들은 재산상황에 대해서 공개를 해야 한다. 자산과 부채는 숫자로 되어 있고, 거기에 어떠한 도덕적 의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산의 숫자가 크면 부정축재한 것은 아닌지 의심을 가지게 된다. 해당자는 설득력있는 설명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숫자로 인해서 도덕성에 의심을 품게 한다.
# 신용등급
신용등급은 금융위원회로부터 허가를 받은 신용조회 회사나 금융회사들이 산정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과거의 신용거래 경험이나, 현재의 신용거래 상태 등을 통해 산정된다. 신용등급은 1등급에서 10등급까지 분류되어 있다.
신용등급은 담보없이 돈을 빌릴 수 있는 '나'의 경제적 능력이다. 신용등급이 나타내는 숫자가 '나'의 경제주체로서의 지위이다.
# 비밀번호
지금은 비밀번호라고 부르는 password가 특수문자, 영문자 등과 혼합해서 사용되고 있지만,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비밀번호는 숫자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인터넷 세계로의 접속을 가능하게 하고, 인터넷 세상이 '나'를 확인짓는 숫자이다.
# 나이
누가 부여하지 않더라도 자연적 시간이, 그리고, 신체적 상황이 '나'에게 부여하는 숫자이다. 원하든 원치않든 나이는 '나'를 시기에 따라 규정짓는 숫자이다. 이 숫자에 따라 어린이, 청소년, 청년, 장년, 노년 등의 카테고리에 속하기도 하고 벗어나기도 한다.
# 전화번호
전화를 마련할 형편이 안되어 주인집으로 쑥쓰럽게 건너가 전화를 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초등학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다. 어떤 이는 전화번호를 2개 이상 보유하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유일하게 복수의 숫자를 가질 수 있는 경우이다.
이 숫자는 '나'의 위치와 상황을 노출되게 만든다.
# 동호수나 번지
과거에는 대문앞 벽에 문패를 걸어 '홍길동'이 사는 집이라는 표시를 했었다. 지금은 동호수만이, 그리고, 번지만이 기재되어 있을 뿐이다. 이 숫자는 '나'의 거주 위치를 확인시켜 준다.
# 기타
자동차번호, 보험증권번호, 계좌번호, 군번 등 '나'를 분류짓고 개념짓는 숫자들은 캘수록 많다.
디지털(digital)이란 특정 정보를 유한한 자릿수의 숫자로 나타내는 방식을 의미하는데,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인간은 형용사로 정의되기 보다는 숫자로 개념지어지고 정의되고 있다. 부여된 숫자가 영속적인 경우도 있고, 한시적인 경우도 있지만, 해당 숫자를 부여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는 아무런 저항없이 숫자를 부여받고 숫자가 주는 영향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