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변론
술을 마시는 이유는 다양하다. 다양한 이유에 대해 열거하지는 않겠다. 다만, 주된 이유는 기분좋아지기 위해, 현실을 잠시라도 망각하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이 대부분의 음주자들의 동기가 아닐까 한다. 집세, 학원비 등 월 250만원이 필요한데, 소득이 월 200만원이거나 월 300만원일 경우, 그 음주자의 삶의 무게감은 술을 먹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사회가 술을 마시게 했는지, 그저 의존적으로 알코올을 섭취하고 싶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개별적 자신에게 질문해 볼 문제이지만, 사회는 이런 구조로 확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술에 의한 망각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주류회사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주는 쪽으로 흘러간다.
술을 마시면 우리의 측두엽이 마비된다. 측두엽은 단기기억을 관장하는 부위로 술을 너무 마시면 필름이 끊기는 이유가 측두엽이 마비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두엽과 후두엽의 도움으로 귀가할 수 있는 귀성본능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장기기억을 관장하는 부위는 알코올에 대해 저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술을 마신다. 아프기 전보다 많이 마시지는 못 하지만, 조금씩 마신다. 우리의 삶은 소박한 행복의 가장 단위임에도 그 규정이 지켜지지 않는다. 코로나에게 책임전부를 물을 수 없다.
변질된 엘리트들이 자신의 지위와 명예, 권력의 향유에 도취되어 개별 국민들의 삶에 대해 외관으로는 관심있는 듯 행세하지만, 진정으로 그 개별적인 국민의 삶에 대해 이해력이 떨어지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관심도 부족하고, 능력의 부재에 의해 국민들은 술을 마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국가는 망하지 않는다. 그것은 철저한 믿음이었으나, 국가가 망할 수도 있다. 외세의 침략이 없더라도 국가는 자멸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변질된 엘리트들의 이기심과 국민들의 도취상태가 국가를 망국의 길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국가는 예전처럼 절대적 존재적 의미를 갖지 못한다. 대한민국이 뭐가 중요한가. 내가 행복하고 삶의 의미를 부여된 대로 살아갈 수 있는 곳이면 그곳이 정착지이다. 대한민국의 국적이 행복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굴레와 피로를 야기하는 것이라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국적을 포기하는 것이 귀결이다.
우리는 우리가 무식하고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고, 변질된 엘리트들을 우상으로 여겼지만, 그들의 행태는 우리와 같다. 막되먹고 무식하며 감정적이고 고매하지 못하다. 결국, 배움이 많은 것이 다른 가치를 추구하지 못 하는, 학습과 성적, 명문대출신과 고시의 통과라는 보통사람이 할 수 없는 그 길을 걸어 지도자랍시고 TV에 나오는 인간들의 파렴치하고 바닥을 보지 않는가. 우리가 현실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가 못 나서가 아니다.
지도자의 무능, 지도체제의 불합리, 사회의 양극적 분열을 야기하고 조장하는 언론, 결국, 우리는 노예와 다른 것이 무엇인가. 자유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선택지가 있는가. 나는 어설픈 엘리트로서 식당 이모의 한 숨을 듣는다. 그리고, 질적으로 차이나는 삶의 모습을 본다. 어느 사회나 계열과 계급, 계층은 분별되는 것이지만, 지금 이 시기만큼 절실하게 절감하게 되는 계기는 없다. 누구의 잘못일까. 국민의 몽매함이, 아니면 광기서린 일부 국민들의 열광이, 무능한 지도자들이, 편협한 지도자들이 우리에게 술 마시라고 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토하고 싶다. 이 울렁거리는 사회에 대해 누구 하나 국민을 위로하는 자가 없다. 철저하게 내 삶은 내가 이끌어가야 할 뿐이다. 이러한 모든 삶의 모순과 분열과 구분은 분명 변질된 엘리트들의 사익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웃을 위로하는데 지쳤다. 나도 위로받고 싶다. 그리고 연민이 든다. 예수님이 돌아가시면서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 하나이다".
제도와 체제, 지위를 넘어 폭넓게 생각하는 위대한 지도자. 소박하고 싸구려한 생활을 하더라도 고매해 보이는 지도자. 그 지도자가 우리를 취하지 않도록 위로해 준다면 참으로 삶은 살아갈만한 그런 것이 될 텐데. 이런 작은 희망도 이승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