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변론
민주주의는 결코 평온할 수 없는 가치이다. 개별 인간이 다양하고, 생각도 다양한데, 어떻게 만장일치, 일치단결을 쉽게 성취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분란이 많고 선택과 결정도 더디고 극렬하게 반대하는 세력과의 갈등이 민주주의에는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합의에 도달하기까지 인내하고 토론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이다. 만약, 이러한 민주주의의 본질적 특성이 싫다면 중국이나 북한으로 가서 살면 된다. 거기는 의사결정'과정', '토론', '타협'은 없다.
미국의 경우 헌법에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상원의 규칙에 따라 어떤 발의안에 반대하는 소수의 또는 한명의 상원의원이 타협요구 내지 그 발의안 철회를 요구하며 쉬지 않고 발언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런데, 상원규칙에 따르면 상원의 압도적 다수가 투표로 토론종결을 원하면 필리버스터는 종료된다. 필리버스터는 수적 열세의 소수가 타협의 강요하는 방법이고, 토론종결은 단호한 압도적 다수가 타협을 거부하는 수단이다.
이 2가지가 하나는 의회의 의사진행을 방해할 수 있고, 나머지는 다수의 전횡이 남용될 가능성이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되자 오바마가 4년 동안 지명한 후보 79명을 공화당이 필리버스터로 막았다.
다수의 전횡과 폭정을 방지하고 소수의 불만과 무력감을 감소시켜 갈등, 분쟁, 시위와 폭동, 구테타 등을 방지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타협'이고 민주주의의 기본요소이다.
그런데, 타협이 성사되었다는 소식보다 결렬에 관한 소식을 더 자주 접하게 되고, 타협조차 허락치 않거나 하는 척하면서 결국 다수의 전횡의 가속도로 정치적 결단이 이루어지고 있다. 점차 정치권을 비롯한 사회는 무풍지대나 온대지역이 없고, 극지방과 극지방만이 남게 되는 형국으로 가고 있다. 한 국가의 이름 아래 마치 두 민족이 살아가는 셈이다.
다수, 배운자, 가진자가 행할 수 있는 미덕은 포용과 인내이다. 소수는 무력하고 저항하는 것이 본래적 특성이다. 누가 타협의 실타래를 풀 수 있겠는가. '네 까짓것들 해 볼테면 해 봐!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을테니'이런 진심어린 다수 내면의 소리가 '귀'로 들리는 것같고, 시각적으로도 목격되고 있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내음 맡기가 힘들어져 고립생활을 해야 하고, 생업은 활기를 잃어 가고 있고, 감염자를 혐오하며 우리가 진정 이웃인가 의문까지 드는 마당에 권력과 부와 명예를 거머쥔 정치엘리트들은 더욱 분열을 조장하니 실로 염려되지 않을 수가 없다. 집 안 단속 못 하는 가장치고 사회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내는 사람을 보기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