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변론
벌써 10여년 전의 일이다. 나이 지긋한 세무사 한 분이 3억 사기죄로 구속이 되었다. 이 사건의 담당변호사는 아니었고 업무상 알고 지내오던 분이었다. 절세해 주겠다는 대가로 몇 명으로부터 다소 높은 수수료를 챙긴 것이 원인이었다. 세무사는 3억원을 암에 걸린 딸의 수술비로 사용했다.
친구가 사업상 급하게 필요하다고 해서 1,000만원을 빌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그 돈을 사업자금으로 쓰지 않고 여행비용으로 사용한 것을 뒤늦게 알았다. 빌려준 돈을 자기 여행비용으로 사용할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결코 돈을 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첫째 사례에서 세무사의 욕구는 딸의 치료비를 마련하는 것이고, 요구는 절세라는 이익에 기초해 상대방에게 돈을 지급받고 싶은 의도였다. 둘째 사례는 친구의 욕구가 여행경비 마련이었고, 요구는 사업자금의 융통이었다.
첫째 사례에서 세무사의 설명 내지 부탁을 받은 상대방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흔쾌히 수수료를 지급했는데, 요구사항은 설명과 전혀 관련없는 욕구사항인 딸의 치료비에 사용되었는데, 후일 상대방이 일의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을 때, 도덕적으로는 측은하게 여길 수 있었지만 법적인 처벌은 행위와 결과책임이기 때문에 상대방이 뒤에 늦기게 된 측은지심으로 발생한 결과를 번복할 수 없다.
둘째 사례에서 친구 사업이 어려워 자금을 빌려 달라는 요구에 친구로써 도와 주어야 한다는 도덕적 감정에 기해 돈을 빌려 주었는데, 알고 보니 개인 여행경비로 사용한 사실을 알고 심한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용도를 기망했으니 사기로 처벌할 수는 있다.
요구는 이를 받아들이는 쪽에서 도덕적 의무감이 생기게 한다. 욕구는 전혀 반대 당사자에게 그런 감정을 야기하지 못한다. 욕구는 저마다 가지고 있는 그저 하고 싶은 것이고, 요구는 누구나 특정 상황에서 주장해 볼만한 것이다.
우리가 요구를 수용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할 때 의무감 내지 도덕감정에 기초하는 경우가 많다. 법적인 요구이고 이를 이행할 의무가 있는 경우라면 감정과 관계없이 그 요구를 이행해야 할 무색의 의무만이 있을 뿐이다. 욕구를 수용해 줄지 여부에 대해서는 의무감 내지 도덕감정이 생기지 않는다. 물론 법적 책임도 없다. 욕구는 그저 욕구를 품은 사람의 희망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타인으로부터 요구를 받을 때 들어줄지 말지에 대해 의무감이나 도덕감정이 생기는 것이고, 그것이 요구가 아니라 단순히 그 타인의 욕구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알게 되었을 때, 흔히 불쾌함을 느끼거나 배신감에 그를 배은망덕하다고 평가하게 된다.
오로지 배은망덕하다는 이유로 법적인 처벌을 할 수 없다. 어떤 경우에는 배신감이 심각하게 너무나 커서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경우나 그럴 수 없는 경우에도 그와 무관하게 화가 치밀어 오른다.
일을 하다 보면 법적 처벌이 측은한 경우도 있고 법적 처벌은 안되지만 배은망덕한 사람을 더 처벌하고 싶은 경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