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평변호사
임진년 7월 8일 이순신은 이른 아침에 미리 약속한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깨어진 전선 7척을 수리하여 이끌고 온 경상우수사 원균와 함께 견내량에서 70여 척의 왜군과 대치하게 되고 이어 한산도로 유인한다.
이순신의 승전보고
견내량의 지형이 협착하고 암초가 많아서 판옥선은 배끼리 부닥치게 될 것이므로 싸움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적이 만일 전세가 궁하게 되면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 갈 것이라. 먼저 판옥선 5, 6척으로 하여금 적의 선봉을 쫓아가 습격할 기세를 보인 즉, 여러 배의 왜적들이 일시에 돛을 달고 쫓아 오므로 우리 배가 거짓을 물러나 돌아오매 적선들도 줄곧 쫓아 오는데, 바다 한 가운데 이르자 여러 장수에게 명령하여 학의 날개와 같이 진을 치며 각각 지자, 현자, 승자 등 각종 총통을 쏘아서 먼저 2, 3척을 깨뜨렸다.
왜적의 큰 배 20척, 중간 배 17척, 작은 배 5척 등을 좌우도의 여러 장수가힘을 합하여 불태워 깨뜨렸다.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갑옷에 화살을 맞아 십사일생에 이르러 간신히 김해로 피신하였고, 막하 선장 마나베 사마노죠는 자결하였다.
H.B. Hulbert는 한산대첩에 대해 조선의 살라미스 해전이라고 평가했고, 한산대첩은 히데요시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고, 중국정벌의 야욕을 분쇄시켰던 것이다. 그 후 수년 동안 전쟁이 지속되지만 그것은 오직 히데요시의 실망을 누그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유성룡
적이 본시 수륙으로 합세해 서쪽으로 올라가려 했던 것인데, 이 전쟁 한번으로 적의 한쪽 팔이 잘려보리고 말았기 때문에 고니시가 비록 평양을 얻었지만 형세가 외롭고 약해져서 감히 더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전라, 충청으로부터 황해, 평안의 연해 일대를 확보해 군량 보급과 호령전달로 중흥을 이룰 수가 있었고, 요동의 김주, 복주, 해주, 개주, 천진 등지까지도 동요하지 않아 명나라 군사들이 육로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니 모두가 순신이 승첩한 공로라. 이 어찌 하늘의 도움이 아니겠는가? - 징비록
영국 해군 제독 G.A. 제라드
불과 6주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그는 전 세계 해전 사상 일찍이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연전연승의 전공을 세웠다. 넬슨, 블레이크, 장 바르라 할지라도 이순신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는 없었다. 이순신의 명성이 그의 조국 이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실로 유감이다.
한산대첩에 대해서는 더 언급할 필요가 없는 이순신 장군의 전공이다. 전략, 전술, 지형지물의 이용 등 모든 것이 맞아 떨어져 대승으로 이끌었던 전쟁이다.
옥포해전부터 한산대첩에 이르기까지 이순신 장군은 9차례에 걸쳐 승리하는데, 수군 재해권의 장악, 왜군의 북진 중단 등으로 전술적 의미도 있지만, 한양이 함락되어 떨어질 때로 떨어져 있는 민중의 사기를 일거에 드높였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여러 차례의 패배로 인해 백성, 군인, 장수 등 패배감에 빠져 있었던 상황에서 이순신 장군의 연승으로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