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변론
몇몇 사람들이 "돌맹이 키운다"는 기사를 접하고 무슨 소리인지 궁금해졌다. 그런데, 모양이 독특하거나 기이한 수석수집은 언제나 있어 왔다. "돌맹이 키운다"는 것은 펫스톤, 애완돌이라 해서 돌을 키우는 것이라고 한다. 돌맹이 하나 사는 행위를 "분양받는다"고 한다.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인가 해서 기사를 좀 찾아보았다.
실제 돌맹이를 분양받고 그것을 반려동물처럼 키우는 것이다. 결코 돌맹이가 자라지는 않는다. 오히려 마모되어 덜 자랄 뿐, 반려동물이 성장하는 것처럼 자라지 않는다. 왜 이런 것들이 주목을 받고 거래가 되는 것일까. 개인적으로는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다.
토템인가. 성황당과 같은. 아니면 가벼운 상술인가. 펫스톤으로 영업하는 사람이나 펫스톤을 분양(?)받아 기르는 사람들은 그 애완돌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마음을 토로할 수 있고 변함이 없다는 상황 속에서 심적 위안을 얻는다고 한다. 마치 고해성사를 물체에 대해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에게 진실로 마음, 감정의 전부를 토로할 수 없으니 돌맹이한테 감정을 전이하는 것이다.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캐스트어웨이'를 보면 윌슨 배구공에 자신의 피로 얼굴형상을 그려 놓고 배구공을 의인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무인도에 난파되어 절대고독 속에서 연명을 하던 톰 행크스는 인간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외로움, 고독을 경감시키고자 배구공을 의인화해서 대화를 나눈다. 로빈슨크루소의 프라이데이는 사람이었다. 무인도를 떠나던 도중 배구공 '윌슨' 아니 친구인 '윌슨'은 바다에 표류하게 된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고 하더라도 고독을 느낀다. 가족이나 연인조차 고독을 해갈해 줄 수 없는 그런 심적 상태, 상황이 있다. 그런 상태, 상황에서 독백의 대상이 '돌'이라니 참으로 어딘가 서글프다. AI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영화 속에서 많이 보아왔고, 일부는 현실화되어 있다. 애완돌도 그런 일종의 해방구라고 해야 할까.
물건을 의인화하는 것은 그리 낯선 것은 아니다. 인형이나 로봇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낯설지 않은 삶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외로움과 고독, 마음의 소리를 건넬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변하고 내가 전한 말이 밖으로 세어 나갈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돌이나 의인화된 물건은 절대 비밀을 준수하고 변하지도 않는다. 변하는 것은 오로지 나의 감정과 사고일 뿐이다.
사람에게 외로움을 전할 수 없는 상황, 시대. 현대인들이 돌맹이를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일까. 복잡하게 인간관계가 얽혀 있어서 외로움이 덜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불현듯 까닭없이 찾아오는 우울감, 고독이 마음을 힘들게 하고 그조차 표현할 수 없는 것이 현대인의 빈곤함일까.
고독은 때로 그 자체로 만끽할만할 때도 있다. 내적인 것을 모두 외부로 표출해야만 건강한 것도 아니다. 기도를 할 수도 있고, 다이어리에 적을 수도 있다. 현대인이 고독하고 우울해하면서도 그것을 관리하기 힘들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토템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고독, 우울감, 외로움은 인간만이 인지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을 완전히 소거할 수는 없는 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