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변론
비가 내리는 날들에 대해 기상학적 이유를 대면 감상에 젖을 수 없다. 비는 궂은 날에도 맑은 날에도 내리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계절에나 내린다. 다만, 내리는 비가 동일성을 갖지 않기 때문에 봄비, 장맛비, 가을비, 겨울비, 장대비 등 여러 이름을 가진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생각나는 음식이 있고, 저마다 이불속 게으름이 있으며, 기억나는 추억이 있다. 비는 대체로 감정을 가라앉게 하고 때로는 우울하게 만든다. 비 오는 날 기분좋아 춤을 추며 즐거워할 수도 있겠지만 기우제가 아닌한 비는 아무래도 사람의 기분을 차분한 어딘가로 안내한다.
비는 그저 내려야 할 상태가 되면 하늘에서 땅으로 착지해서 깨져버림으로써 그 짧은 수명을 다 하는데 이를 지켜보는 사람의 감각, 감성, 지성이 같은 비를 다른 비로 의미를 부여한다.
다만, 어느 경우나 비가 초래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 계절이다. 일정 시기에 겨울비가 내리면 봄을 재촉하는 비라 하고, 늦봄에 비가 내리면 여름을 재촉하는 비라 하고, 늦여름에서 가을 문턱에서 비가 내리면 가을을 재촉하는 비라 하고, 늦가을에 비가 내리면 겨울을 재촉하는 비라 한다.
비는 땅으로 뿌려져 산산히 깨어지는 운명을 가지고 있는데 다음 계절을, 미래를 재촉한다고 하는 것일까?
비가 내린 후 따뜻해 지고, 더워지고, 추워지고 그래서 비는 동일성이 없는 언제나 개별적인 무엇인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비는 언제나 재촉하지만 그 대상은 다르다. 아니 우리가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고, 이에 대해 전혀 가역반응이 없다. 비가 무엇인가를 재촉한다는 의인화된 속성에 대해 우리는 전혀 반대할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다.
비는 언제나 재촉하는 무엇이지 마감하는 무엇이 아니다. 단 한 차례도 내리는 비를 향해 봄을 마감하는 비라고 표현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비는 언제나 다음을 재촉한다. 다만, 우리는 그 속에서 이전 것을 회상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