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변론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 마태복음 24장 13절"
신약성경 마태복음의 말씀이다. "견디는"의 대상이 마태복음 해당 말씀의 전반부, 후반부 등을 연관지어야 하지만, 신앙을 가지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구절은 지금 이순간부터 향후에도 한번쯤 생각해 보고 실천방법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해서 성경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글을 적어본다.
코로나로 2년 남짓 힘들게 지내왔고, 방역조치가 완화되었다고 해도 코로나 이전보다는 삶의 형편이 낫지 않다. 신체적 후유증, 정신적 우울, 경제적 곤란 등은 미생물이 인간에게 남긴 커다라 2차 확대손해이다.
게다가 우리 잘못도 아닌데 외국의 전쟁으로 유가, 식자재, 곡물 등의 가격이 치솟고 물가잡겠다고 금리까지 올라가는 상황에서 경제적 곤궁함이 정신적 스트레스로, 그리고 육체적 피로로 이어지고 있다.
일부는 분노조절을 못 해 엽기적으로 타인의 삶을 빼앗고, 가족이 동반자살을 하는 등 우울하고 비관적이며 부정적인 소식들이 심심치 않게 매체를 통해 전달된다. 위정자들은 공직자의 의무를 망각한 채 사리사욕으로 제 역할을 하지 못 하고 있는 것도 목격된다.
일상은 단조롭고 즐겁지 않으며 고단하기만 하다고 느껴진다. 암울한 것은 그런 일상이 내일이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생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사는 재미가 도통 없다. 그렇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 상황이 호전될 것 같지 않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그렇게 절감된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자초하지 않는 한 우리는 짧은 죽음인 잠에서 깨어나고 어김없이 각자에게 주어진 것들을 해야 한다. 살아가야 한다. 다만, 살아가야 하는 상황을 고단하게 여길 것인지, 감사하게 여길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사항일 뿐이다.
우리는 주어지는 현실을 바꿀 수 없고, 내일의 것도 바꿀 수 없다. 할 수 있는 최선은 시선의 변경, 자세의 변화, 심경의 개선 뿐이다. 죽음이나 일탈은 삶을 유지하거나 개선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로지 "끝까지 버티고 견디어 내는 것", 그러한 각오만이 삶을 지탱해 줄 수 있다. 죽을 각오라면, 그 정도의 비장함이라면 견디지 못 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
끝까지 버티니까 이길 수 없는 형편임에도 이길 수 있다. 죽을 각오로 임한다면 살게 된다(생즉필사). 게다가 끝까지 버티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메시아가 말씀하지 않았는가. 견디기 힘들다고 느끼는 것, 참기 힘들다고 느끼는 것, 살기 힘들다고 느끼는 것, 나의 삶은 타인의 삶에 비해 형편없다고 느끼는 것은 모두 우리의 조급하고 편협한 마음 속에서, 삶을 망원경으로 보지 않고 돋보기로 보는데에서 비롯된다.
모질지만 힘든 질곡은 당장 마무리되지 않는다. 거센 파도에 한번 옷 적셨다고 해서 다음 파도가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래서, 끝까지 버티고 견딜 뿐이다. 다른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애간장이 녹는 고통, 피가 타들어가는 고통이라 해도 실제 내장이 녹아내리거나 피가 마르지 않는다. 단지 그렇다고 느끼고 표현할 뿐이다.
지금은, 죽음의 사자가 영혼을 체포해 갈 그 순간까지 끝까지 버티고 견뎌 내야 한다. 버티고 견디어 낸 순간들, 날들이 언젠가 기쁨으로 나아가 구원으로 이어질 것임을 굳게 믿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