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변론
"바른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누구도 저 명령과 의무에 부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바른 자세는 보기에 좋을 뿐 아니라 건강에, 건강유지에 이롭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상은, 보통의 경우에는 무의식적으로 "구부정"한 자세로 살게 된다. "구부정한 자세"가 편하기 때문이다. 편하다는 것은 의식적인 노력이 생략되고 에너지 소비과정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바른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노력과 에너지 소비가 필요하다. 등을 펴고 허리를 곧추 세우고 턱을 당겨 바른 자세를 유지하는데 노력, 에너지, 의지가 필요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교정장비를 부착해야 할 수도 있다. 도구의 도움까지 받아야 바른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바르게 되는 것, 바르게 사는 것. 나아가 "올"바르게 사는 것에는 예상 이상의 노력, 의지, 에너지가 필요하다. 인격이 바르게 되고 실천으로 삶을 바르게 진행함에 있어 정신적 에너지까지 필요하다. 도덕과 규칙을 준수하고 상식에 부합하는 삶의 자세를 바른 자세라고 한다면 그만큼 '애'를 쓰지 않으면 안된다. '애'는 바름이 되고 바름을 유지하기 위해 기울이는 모든 노력과 정성, 에너지와 의지 등을 총망라한다.
구부정한 자세가 중력과 편함에 굴복한 결과이듯 구부정한 인격과 삶의 모습은 부정과 이기(利己)에 굴복한 결과이다. 다수의 눈에 띌 정도로 구부정한 인격과 삶의 태양은 당사자는 물론 타인에 의해 제재와 속박을 당할 수 있다. 그러나, 숨죽이며 도사리는 구부정함을 '애'써 감추는 사람은 바르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 속에 숨어서 '바른 척'하며 살고 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구분지을 줄 알아야 하고, 가능하다면 그를 교정시켜 줄 필요도 있다. 그것이 또하나의 바르게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부정한 자세의 모양이 대체로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나듯이 구부정한 삶, 인격 또한 비슷한 양상을 드러내고 감염력도 상당해 선량한 사회 구성원들에게 해악을 끼칠 수 있다. 구부정한 인간이 자성하지 않는 한 사회가, 다수가 그를 교정시켜 주어야 한다. 구속과 속박의 필요성은 구부정한 자세에 대한 교정목적 때문에 발생한다.
바르게 살기 힘든 이유는 바른 자세를 유지하기 힘든 이유와 유사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