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변론
스티브 잡스가 암 진단을 받고서 죽음에 대한 그의 심적, 의지적 태도를 보인 글이다. 죽음을 통해 삶의 소중한 것을 가려내는 도구로 삼는 그의 정신과 의지가 보통 사람들과 너무나 다름을 확인할 수 있다.
2018. 12. 말경 재판을 마치고 법원 복도를 걷다가 현기증을 느끼며 쓰러질 뻔한 적이 있다. 결국 응급실로 실려 갔는데, 뇌척추동맥박리라는 다소 희귀한 뇌혈관의 찢어짐 진단을 받았다. 조금만 늦었어도 뇌출혈로 몸의 어딘가가 마비될 수 있고, 말을 못 하게 되거나 인지능력이 상실될 수도 있을 상황에 이를 뻔했다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혈압을 낮추는 약물과 진통제가 혈관으로 직접 전달되었다. 대소변을 침대 위에서 해결해야 했다. 혹시 큰일을 보다가 혈압이 상승할 경우 뇌혈관의 나머지 한 겹이 찢어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의사가 말했다. 큰일을 보면서 항문에 힘을 주는 것조차 할 수 없다니, 성인용 기저귀로 생리적 현상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치욕적이었다. 하지만, 너무 힘든 고통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치욕과 수치조차 사치였다.
의사 선생님은 최소 1개월을 침대에서만 지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처리하지 못한 일들이 머리를 스치고 혈관이 서로 들러붙지 않을 경우 대퇴부 동맥을 관통해서 뇌혈관에 코일을 깔아야 한다고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혈관이 찢어진다는 게 무척이나 대수로운 것이었다. 죽음은 예약을 모른다. 사전통지도 생략한다. 다만,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언젠가 닥칠 사건이 조만간 닥칠 것이라는 것 정도로 확인되는 수준에 그친다.
죽음이 인생의 소중한 것을 가려내는 도구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내 경우엔 해야 할 수많은 것들과 하지 못한 수많은 것들이 아픈 머리를 꽉 채우고 서로 다투고 있었는데, 어떻게 잡스는 소거법으로 소중한 것을 가려 남길 수 있었을까.
삶에 대해 진지하고 자신에 대해 진정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은 죽음 앞에서 혼란스러워 하지 않는 모양이다. 오로지 분주하게 살되 삶과 자신에 대해 깊은 성찰을 간과한 사람이 죽음 앞에서 더 분주해지는 모양이다. 요즘도 혈압약을 복용하고 있고, 공황증세를 완화하는 약을 먹는다. 하루에 20알 가까이 약을 먹는 듯 하다. 그리고, 여전히 글을 쓰고 사건을 최대한 유리하게 해석하고 의뢰인과 대화를 하고, 상담을 한다. 예전보다 쉽게 피로해진다.
죽음이 남기는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저마다 다를 것이다. 가족, 버킷리스트, 품격과 냉정, 기도와 회개, 하던 것의 마무리 등등 소거가 잘 되지 않는다.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늘어나기만 한다. 조금 더 뒤에 죽음이 오기를 갈망하게 된다. 가급적 좀더 후에.
확실한 죽음이 불확정한 시기에 다가온다. 그럼에도 죽음에 대해 진지한 생각은 잘 하지 않는다. 오늘을 낭비하고 낭비될 내일이 확실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들어도 크게 두렵지는 않다. 안타깝거나 당황스럽거나 놀랍다가 결국 시간이 지나 무시하게 된다.
죽음이 다가온 후 소중한 것을 가려내지 말고 죽음의 확실성이 다소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삶에서 소중한 것을 찾고 그것을 추구할 수 있다면 언젠가 실재적 죽음이 다가왔을 때 조금은 의연해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