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변론
현재 상황에서 기득권을 보유하고 있으면 그 사람이나 기업으로부터 혁신은 발생하지 않는다. 다만,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기업도 변화는 추구하기 때문에 '혁신'을 추구하지만 예측가능한 수준에서 약간의 개선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혁신은 젊음에서, 청년에게서, 신생기업으로부터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기득권층은 이미 존재하는 환경, 상황, 요건에서 만족할만한 이익을 얻고 있기 때문에 그 프레임을 파괴하는 혁신은 추구하지 않는 내재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오히려, 기득권에 속한 부류는 혁신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아주 미시적인 것에 그칠 뿐, 기존의 틀을 송두리째 변화시킬만한 그런 것이 될 수 없다.
혁신에는 미시적이고 미세한 개선 수준의, 예측가능한 혁신이 있고, 기존의 틀과 프레임을 파괴하는 파괴적 혁신이 있다. 이를 창조적 파괴라고 부르기도 하는 혁신이다.
후자와 같은 혁신은 젊은 세대와 신생기업으로부터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국가는 혁신을 주장하지만 관료의 본질적 속성상 창의성, 창발성이 매우 저조하다. 국가의 정책이 혁신적이라고 할 때, 진실로 혁신이 이루어진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기존의 기득세력(장년층, 노년층, 주류기업, 고위 관료 등)이 '혁신'을 주장하며 변화에 갈증을 품는 듯 하지만, 숨은 의도는 외부적 의사표시와 반대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금 이 순간', '지금 이대로'도 이익을 얻을 수 있는데, 그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불확실한 변화에 판돈을 걸 사람이나 기업이 존재할리 만무하다.
변화, 그것이 좋은 변화이든 나쁜 변화이든 변화의 끝에서 경험할 세계는 현재로서 불확실성의 생태계이다. 특히, 기존의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프레임을 야기할 그러한 변화는 더욱 불안감을 줄 수 밖에 없다. 기존의 것들은 시적 한계가 다다르고 있고, 불안의 조짐이 나쁜 변화로 귀결되더라도 젊음에게는 시적 한계가 긍정적 도전을 위한 여지에 미치지 못 한다.
젊음이란 그렇기 때문에 부러운 그 무엇이다. 젊음은 불안을 극복하고 혁신을, 변화를 추구한다. 아니 추구해야 한다. 파괴적이나 창조적인 혁신과 변화는 젊음의 정수이다. 기존의 것들, 사람들, 세계는 그 과정에 응원을 보태고 보상을 안겨줄 준비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