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변론
우리는 나름의 잣대와 기준으로 타인을 평가하는 일에 매우 익숙하다. 소통의 도구인 소셜미디어는 그 본래적 의미를 상실하고 갈등과 분열을 더욱 조장함에도 불구하고 버릴 수 없는 문명의 이기가 되었다. 사회는 가변적인 분열과 집합의 과정을 망각하고 0과 1로 재단할 수 있는 듯이 집단최면에 걸려 대립의 끝점이 어디에 가 닿아 있는지 확인하려는 기세를 보인다.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가치관, 세계관, 정치적 타입, 종교적 색채 등을 기반으로 타인을 평가하기 때문에 지극히 이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우리는 초연결 사회에 살고 있어서 과거 그 어느 시점보다 의존적 방향으로 서로 의지하면서 협조적 삶을 추구해야 함에도 행위와 사고의 자유를, 의심스러운 수준까지 강조하면서 자신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보다 더 많이 보장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서 서슴없이 나와 다른 가치관 등을 가진 대상에 대해 흥분한 상태에서 공격을 해 대고 상종못할 부류의 범주에 포함시킨다. 특히, 정치 지도자들이 이러한 상황에 직면에 있고, 이를 더욱 부추김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의존적임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다른 세력이 없어지더라도 유지될 수 있다는 착각에 더 나아가 세상이 개선될 것이라고까지 상상한다.
인간도 본질적으로 자신의 생명장치의 안정화와 지속적 안정을 추구한다. 그것에 많은 신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그리고 시간을 지출한다. 때문에 희생과 헌신없이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섬기는데 사용할 에너지가 풍부하지 못 하다. 물론, 가족이라면, 또는 베스트인간관계라면 자신에게 사용할 에너지와 시간을 대가없이 지출할 수도 있겠지만, 여당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야당을 공감하는데 사용할 에너지와 시간, 그러한 의향조차 없다. 때문에 이상하리만치 삶은 서로에게 의존적인 상태가 필수불가결한데, 외부로 표현되는 양상은 지나치게 대립적이며 분노적이다.
우리가 새로운 것을 배울 때 상당히 의지적이어야 하고, 불편한 절제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도록 유지해야 하는 과정도 동시에 실행해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수용하는 과정이 쉽지 않은 것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에너지와 시간의 총량이 감소하기 때문에 이같은 과정이 더욱 힘들게 여겨진다.
상황이 이러하니 자신과 다른 가치관, 세계관, 정치적 타입, 기호를 가진 타인에 대해 이해와 공감의 노력을 기울이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타인에 대해 분노하고 질타하며 욕을 해대는 과정에도 상당한 에너지와 시간이 소비된다는 점이다.
나의 자유는 타인과의 의존 위에 계속성을 유지할 수 있다. 의존적이라는 말은 저녁에 먹을 통조림 음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음식의 재배자, 조리자, 캔의 제작자, 캔의 원료인 광물의 채굴자, 통조림의 운반자, 판매자 등등의 수많은 의존적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노력지출에 의해 저녁에 간편하고 맛있는 음식을 데워서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조림을 먹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 생산, 유통과정이 아닌 다른 포지션에 있을 때 나아가 자신과 다른 가치관 등의 대립점에 있을 때, 지나치게 분노하고 질타하지 못해 안달이 나는 것일까.
익숙한 것, 습관적인 것은 에너지와 시간의 지출면에서 절약적이다. 가치관 등도 유사한 내용이면 적극적 노력없이 공고하게 하는 정보를 통해 다져지니 절약적이다. 하지만,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새로운 것을 수용하는 것에는 엄청난 에너지와 시간,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불편과 절제가 필요하다. 때문에 우리는 반목하는 것이 편하고 그것이 더 선명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으며 이로써 사회는 더욱 쇠약해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