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생활
모두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이중적 양심을 가지고 살고 있다. 외관상 포장된 양심과 실재적인 양심, 후자는 자신만이 지각할 수 있는 양심이다. 양심은 어진 마음이고, 두 개의 마음이 아니다. 우리가 "저 새끼! 양심이 없네"라고 할 때, 두 개의 마음 중 하나나 둘이 고갈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진 마음이 없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죄책감을 느끼거나 선한 것을 지향하고 악한 것을 지양하는 것은 두 개의 마음간의 갈등의 간격과 간격의 차이 때문이다. "양심상 도저히 그 짓은 못 하겠다!"라고 할 때, 그것은 하나의 인격 안에 두 가지의 간극이 있는 마음간의 갈등이 어떤 행위, 선택을 주저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양심이 없는 자들이 세상에 너무 많을 뿐만 아니라 버젓이 벌받지 않고 살아가고 있으며, 자신이 "머 그리 잘 못 했냐"며 항변하는 것을 스트레스적으로 듣고 보아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MBTI와 같은 것 말고 러신머닝이 정의를 제대로 내려줬으면 좋겠다. '김남국, 조국, 조민, 송영길, 이재명, 그리고, 저지른 행위와 앞서 보이는 행위의 모순을 드러내는 모든 자들'에 대한 정의. 그래서, 키워드만 입력하면 '결코 상종해서는 안되는 인간들, 해악, 해충, 타인의 피를 빨아먹는 뱀파이어, 거머지 등등'
초등학교 시절 문방구에서 장난감 하나를 훔쳤는데, 그것이 들키지 않아서 너무 좋았다. 그런데, 집에서는 동생들이며 엄마며 "이거 어디서 났냐"며 물어봤다. "어, 친구꺼 빌린거야"라고 했다. 문방구 아저씨는 지금까지 내가 장난감 훔친 사실을 알지 못한다. 여전히 반장도 하고 공부 잘 하고 인사 잘 하는 아이로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절도의 현장에 계속해서 물건을 사러 다녔다. 재범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현재에도 마음에 꺼림칙함이 남는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돌아가서 나는 물건을 훔쳐 놓고 "아저씨! 애들이 물건 많이 훔쳐요! 잘 관찰하세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도 부끄러운데, '에이 어릴 때는 다 그런 경험 한두번즈음은 있지 뭘 그래'라고 한다면, 나는 법적 책임에서는 벗어날 수 있어도 나의 양심의 채벌에서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는 규칙이 분명이 있다. 도덕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느끼는 법감정, 도덕감정도 있다. 그런데, 왜? 버젓하게 그런 것들을 속이고 이용하고 타인의 피를 빨아먹는 인간들이 벌받지 아니하고 "나는 잘못 없네"라며 살아가는 꼴을 두 눈으로 목도해야 하는 것일까.
검찰 공화국이며 뭐며 지랄하고 있지만, 썩어빠진 정신상태와 타인의 돈, 피를 빨아먹으며 살아가는 것들에 대해서는 압수수색이 천번만번이라도 되어야 한다고 본다.
정의는 세우는 것이지, 타협하는 것이 아니다. 정의는 하나의 개념을 가질 뿐이므로 절대 중의적인 의미가 될 수 없다.
비양심적인 인간이란 한편으로는 옳은 말이고 한편으로는 그른 말이다. 양심은 어진 마음이라는 의미에서 그에 벗어난 삶은 채벌을 가해야 하는 것이고, 두 개의 마음간의 간격이 허용범위를 초과했을 때 체벌해야 하는 의미에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