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변론
노동자는 '노동'이라는 순수 가치, 노동자 자신, 노동자의 존재 자체를 상품처럼 매도하고 그에 대해 대금을 받는 지위에 있다. 노동의 가치와 양에 따라 그 값은 달리 매겨 지겠지만, 노동이 순수하게 자연체인 인간의 신체적 에너지와 정신적 부담을 재화와 용역에 쏟아붓는다는 점에서 순수 노동자(근로자), 고용주도 같은 위치에 있다.
다만, 고용주의 경우 고용자(근로자)에 대해 약속된 대가를 약속된 날짜에 반드시 지급해야 하고, 가급적 적은 임금을 지급하되 더 많은 성과를 거두기를 바란다. 반대로 근로자의 경우 가급적 편하고 적게 일하면서 높은 임금을 지급받고 싶어 한다. 거듭하여 말하거니와 사주와 근로자는 영원히 이별한 상태로 각기 다른 성질의 이익을 추구하는 관계이다.
노동자의 이익, 노동의 권리, 노동 3권의 유지, 강화, 실현을 주창하고 이를 독려하며 이들을 위해 법을 만들고, 지원을 하는 것이 진보적이며 인권적인 것으로 사고하도록 만들어져 왔다. 자본가의 착취시대에 비해 현 시점으로 근접할수록 노동자의 지위와 삶의 질은 상당히 개선되었다. 물론, 여전히 위험군 속에서 상처를 입거나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사건들은 발생하고 있다. 종료를 모른다.
노동자의 권리와 그들의 형편을 대외적으로 공시하고 체계적으로 자본에 대해, 시스템에 대해 저항력의 실질적 결집과 지향을 위해 노동조합이 탄생하였다. 노동조합은 모래알처럼 분산되어 있는 노동자들이 겪는 부당한 처우에 대해 집단적 목소리로 자본과 체제에 대해 저항하기 위함이 그 태생적 목적이고, 부당한 처우의 개선과 향상된 근로조건의 실현을 위함이 궁극의 목적이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일하지 않는 노동조합의 조합원이 생겼고, 이들은 실제 일하는 노동자보다 더 많은 이익을 취한다. 그리고, 이들은 카르텔을 형성하여 자신의 영향력 하에 순종하는 노동자들은 보호하고, 그 대가를 떼어가며 결코 노동하지 않는다. 자본가, 부루쥬아를 욕하더니 "두목노동자"가 된 것이다. 이 표현은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나타나는데, "두목노동자"라는 표현에도 모순이 있다. "두목노동자"는 노동을 하지 않고, 노동자들 전체를 대변한다는 명목으로 효과적인 결사와 집회, 시위 등을 통해 자본과 체계에 대해 "한 방" 먹일 궁리를 한다.
"두목노동자"는 자본가로부터 돈을 뜯어내고, 노동자의 노동으로부터 돈을 뜯어낸다. 그리고, 그것이 매우 정당하고 노동자들이 지금처럼 근로조건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의 집회와 시위 덕분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은연 중에 뇌세하고 있다.
"두목노동자"는 일부 권력 부류와 합세하여 노동자를 위한 집회, 결사, 시위가 아닌 정치적 목적이 다분하며 그것에 노동자를 위한 그 어떠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지 아니한 집회, 결사, 시위를 종종, 자주, 빈번하게 벌인다. "꺼리"가 없으면 꺼리를 만들어 낸다. 명시적인 행위를 간헐적, 정기적으로 해야 조합비로 빌어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은 누구나에게 힘이 들고 불편한 것이다. 창세기 3장 15절로 17절 "어느 날 뱀이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면 눈이 밝아져 야훼와 동등해질 것이라고 유혹했다. 이 유혹에 넘어간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고 아담에게도 이를 먹게 했다. 두 사람은 자신이 발가벗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고 수치심이 생겨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었다. 두 사람이 자신의 당부를 어긴 것을 알게 된 야훼는 분노하며 두 사람을 책망하였다. 야훼는 하와에게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아담에게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평생 땅을 갈아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먹고살 수 있는 고통의 저주를 내렸다."
그러하므로 노동은 필연적으로 생존을 위한 수단이 된 것이다. 노동이 마냥 즐겁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벌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공통된 사항이다.
"두목노동자"는 자본과 체제에 대적하는 척하고 노동자를 위하는 척하면서 아무런 노동도 하지 않는 부류이다. 이러한 "두목노동자"는 노동자를 위한 또하나의 착취 주체이므로 반드시 근절되어야 한다.
"두목노동자"는 노동자들에게 말한다. "나를 따르라! 그러면, 지금 받는 임금보다 더 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