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평변호사
일찍 귀가하는 날이 일년 중 몇일이 될까. 아버지들의 삶은 사회라는 과목에 구속된 시간이 더 많다. 얼큰하게 취해서 귀가하면 착한 마누라만이 "왜, 이렇게 늦었어?"라고 말이라도 섞어 주지만, 덜 착한 마누라는 남편이 귀가한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 한다. 다들 잠들어 있다. 안팎으로 아버지를 반겨주는 이는 없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아침에 몸을 일으키는 것이 점점 힘들어진다. 밤새 술마시고 다음날 출근하던 날이 있었나 할 정도로 몸이 쇠해짐을 하루가 달리 절감한다. "그러게, 술을 작작 좀 마시지". 다른 사람이 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자신도 안다. 하지만, 어쩌랴. 예민해진 감각이나 젓산이 쌓인 몸을 풀기 위해서는 마취제가 필요한 것을.
처자식과 아이들을 보면 돈을 벌 수 있는 기간이 길수록 바람직하다는 생각은 모든 아버지들이 하고 있다. 약도 복용하고, 담배도 끊고, 술도 줄이고, 운동도 해 보려고 계획을 삼지만, 내가 주도하는 것이 삶이 아니기 때문에 작은 계획과 다짐은 쉽게 무너져 버린다. 한번 무너진 약속과 계획은 다짐으로 미루어 두었던 뿌리깊은 습관의 부활을 너무나 쉽게 소환시켜 버린다.
아버지들은 그다지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고단하기 때문에 그럭저럭 살다 쉬이 눈감을 수 있기를 원한다. 하지만, 최소한 처자식이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는 죽으면 안된다는 처절한 사명감이 있다.
아버지인 사람은 아프면 안된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아프면 본인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 주변이 소란스럽다. 나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홀로 아픔을 달래는 외로움이 세상 모든 아버지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의 숙명이다.
아버지로 살아가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요구사항은 많아지고,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소득을 창출하는 것은 기본이고, 요리도 하고, 책도 재미나게 읽어 주어야 하며, 주말의 전반적인 시간을 가족을 위해 또 내어주어야 하는 부지런함을 이 시대는 요구하고 있다. 가족을 위하는 것인데, 무슨 생색을 부리는 것인가라는 질책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스폰지가 물을 잘 머금으려면 어딘가에는 머금은 물을 짜내어야 한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 풍토는 아버지가 머금은 물을 짜낼 겨를을 제공하고 있지 않다.
계속해서 아버지는 아파해서는 안되고, 아플수 없는 존재가 되어 간다. 그럴 수 없는데도 그런 노력이라도 하라고 요구당하고 있다.
샘 깊은 우물로 계속 퍼내어 물을 기르면 우물은 마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