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평변호사
친정이란, 결혼한 여자를 기준으로 부모형제가 살던 집을 의미한다. 간단히 결혼전에 여자가 살던 집이다.
유교적 관념에서 여자에게 결혼이란 출가이다. 집을 나서는 것이다. 출가해서 외인이 되는 것이 여자에게는 결혼의 의미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개념적 의미와 전통적 의미가 변색되었다. 맞벌이가 대세이기 때문에, 자녀양육때문에 친정에 가까이 살거나 아니면 얹혀 살거나 그렇다. 친정은 비용절감의 자구책이 되었다.
결혼으로 인해서 여자에게 친정의 의미는 크게 변하지 않게 되었다. 가까이서 자주 볼 수 있고, 아이들을 맘놓고 맡길 수 있고, 여전히 부담없이 여자는 엄마와 쇼핑하고, 잔소리하고 도닥거릴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예전에는 친정을 들리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친정을 들리면 밤새 도란거리며, 못난 아버지가 엄마를 괴롭히는 사연에 대해 하소연을 듣고 함께 남편과 아버지를 욕하면서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했을 것이다. 게다가 친정이 못 사는 경우에는 발길을 돌리기가 힘들고, 눈물이 새어 나오는 것이 비일비재 했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가집 문지방이 닳는다는 옛말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마누라의 미모와 관계없이 처가집 엘리베이터가 불이 난다. 전통적 의미에서의 친정의 개념이 소멸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출가외인, 이제는 그 외인이 남자가 대부분이다. 남자를 기준으로 본가를 들리는 횟수나 시간보다 처가에 가깝게 지내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그래서 그리움이 남자가 본가에 대해 더 절절해졌다. 결혼한 여자가 친정에 대해 느끼는 절절함은 과거보다 덜 해졌다.
단절은 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 친정이 그립다. 친정 부모님이 보고 싶다. 이런 감정은 요즈음 여성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것이 되어 버렸다. 물론, 혼인으로 인해 친정과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생겨 버린 경우에는 이런 생각에 대해 동의하지 못 할 수 있다. 하지만, 친정의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 요즈음 친정에 대한 그리움은 물론 소중함도 감소되었다.
언제라도 맛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들은 간절함의 대상이 아니듯, 애절한 기다림없이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다른 관계에 빗대어 뒤로 미루어 놓는 것이 사람의 인지상정이다.
자주 친정부모를 만나면 부모가 늙어가는 것에 대해 둔감해 진다. 오랜만에 만날 경우, 참으로 부모가 늙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일년에 두번 만날 수 있는 관계라면 진실로 친한 관계이다. 부모를 자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그 빈번한 가능성 때문에 소중함이 절감되어서는 안된다.
늘 곁에 있으니 그러려니 하지 말자. 언젠가 절대적 소멸이 후회로 남을 수 있다. 친정 부모님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라고 불리우는데, 그 '외'는 바깥 외(外)자이다. 늘 딸의 눈치를 보고, 사위의 눈치를 보신다. 편하다고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닌 것이다.
어둑한 시간, 조용히 한 통의 전화를 드려보자. "뭐 드시고 싶은 것은 없어요?", "어디 가시고 싶은 곳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