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평변호사
음수에 음수를 곱하면 양수가 된다. 하지만, 양수에 양수를 곱하더라도 음수가 되지는 않는다.
부정의 부정, 즉, 이중 부정은 긍정이 된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부정의 부정은 더 강한 부정을 뜻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아무런 행복도 느낄 수 없었다"라고 할 경우, '아무런(no)'과 '없었다(not)'의 두 번의 부정이 삽입되어 있지만, 도통 행복을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을 더욱 강조하는 의미의 표현이 된다.
옥스퍼드 대학의 철학자 오스틴은 "이중 부정이 긍정이 되는 언어는 많지만, 이중 긍정이 부정의 의미가 되는 언어는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강연을 듣고 있던 컬럼비아 대학의 철학자 스디니 모겐베서는 "예~~, 예~~"라고 꼬집어 말하면서 응답했다.
사람의 관계에서도 이중 부정이 긍정으로 적용되는 경우가 있다. 적의 적은 동지 내지 친구라는 것이다.
나의 적은 A, A의 적은 B라고 했을 때, 나는 B와 친구 내지 동지가 될 수 있거나 그럴 수 밖에 없는 관계라는 것이다. 의심없이 이 명제를 신뢰해 왔는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 명제에는 기본적인 전제가 깔려 있는 듯 하다.
첫째, 적대관계, 적이 동일해야 한다. 나의 적도 A이고, B의 적도 A여야만 이 명제가 성립할 수 있다.
둘째, 나와 B가 A에 대해 느끼는 적개심보다 서로간에는 그것이 덜 해야 한다.
셋째, 나와 B는 힘을 합쳐 A에게 대항하려는 기본적인 욕구가 있어야 한다.
사실, 사람은 동일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을 확인한 후에는 가까워질 가능성이 높고, 우정(?)을 돈독하게 키워 나갈 가능성이 높다. 적의 적이 친구라는 것은 나의 적을 없애기 위해 필요한 개념이다. 하나를 몰아내기 위해 먼 관계를 끌어들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적을 몰아내기까지 적의 적인 친구는 유용하지만, 적이 소멸되고 나서는 적의 적인 친구의 존재에 대한 처우문제는 종전보다 쉬운 문제는 아니다.
귀히 친구로 지내든지, 아니면 1:1의 관계에서 '팽'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