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평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에서는 인간의 행위를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으로 구분한다.
노동은 연명을 위해, 생계 유지를 위해, 필연적으로 행하는 활동이다. 작업은 인간의 수명을 넘어 지속하는 인공 세계를 창조하는 활동이다. 행위는 타인의 존재 앞에서 생각을 말하고 실행하는 활동이다.
결국, 인간의 행위는 욕구에서 비롯된다. 노동은 생계 유지를 위한 생물학적 관점에서, 작업은 인간이 무언가를 양산하고 창작하고자 하는 관점에서, 행위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인정받고 관계를 맺고자 하는 관점에서 각 욕구에서 파생하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이 삼분된 욕구와 활동을, 노동은 노예가, 작업은 장인이, 행위는 귀족에게 귀속되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삼분된 구분이 현재에는 의미가 없어졌다. 우리는 모두가 돈을 벌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노예가 하던 일, 장인이 하던 일, 귀족이 하던 일을 직업이라는 개념 속에서 다 해야 한다. 생물학적 욕구를 해소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노동을 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노예가 된 것이다.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제현주'에서는 일, 직업이라는 한 요소를 통해 생존욕, 창작욕, 관계욕을 모두 충족해야 하기 때문에 일을 둘러싼 모순이 발생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위 세가지 요소를 모두 충족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위와 같은 기준에서 보았을 때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하고 싶은 일을 해서 창작욕, 관계욕을 충족시킬 수 있게 되더라도 소득이 적고, 소득이 많으면 창작욕이나 관계욕을 충족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일이 하기 싫은 이유, 이직을 꿈꾸고 창업을 꿈꾸는 것은 이런 이유일 것이다(작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공감). 일을 통해서 사회적 지위, 존재감, 먹고 입고 자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시대에서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일과 사생활의 균형을 맞추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일을 사랑해야 한다는 최면을 거는 이유도 이에 있을 것이다.
일을 통해서 충족되는 부분도 있겠지만, 여전히 충족되지 않는 부분이 남아있기 때문에 우리는 일이 때로는 싫고, 다른 일로 교체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