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평
S 회사의 외식사업부와 지입계약을 체결하고 식자재 납품을 하는 을남이 있다. 을남은 자정에 식자재를 지입차량에 싣고, S 사와 식자재 공급계약을 체결한 일식집, 군부대, 뷔페 등으로 식자재를 운송해서 해당 업체의 냉동고에 저장해 놓고 귀가하면 일과가 끝난다. 남들이 출근하는 시간에 귀가하는 것이다.
을남이 하루에 운반하는 식자재는 개략 3톤 정도로 쌀, 야채, 냉동 연어 등을 등에 지거나 카트로 해당 업체의 냉동고로 일일이 나른다. 을남의 허리는 그야말로 아작이 날 지경이다. 게다가 을남이 식자재 운반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땀으로 온 몸이 젖어 있고, 기운이 쳐져 졸음운전을 하기가 십상이다.
성실하게 일하는 을남은 어느날 S사로부터 청구서를 받았다. 'ㄱ'업체에 냉동 훈제연어 20Kg 미배달 275만원, 'ㄴ' 업체 냉동고 문을 열어 두어 냉동고 내 식자재 전부 해동 부폐 175만원, S 사 이미지 손상 페널티 50만원 등 500만원을 S사에 배상하라는 내용이다.
을남은 'ㄱ' 업체, 'ㄴ' 업체의 담당자(영양사, 요리사 등)와 통화를 하고, "배달했고, 냉동고 문을 닫았다"고 다투어 본다. 그럼, 'ㄱ' 업체, 'ㄴ' 업체의 담당자는 S 사에 다시 컴플레인한다. S사는 기업이미지 때문에 '을'이 되어 을남에게 '갑'질을 한다. 을남은 억울하지만, S사와 계속거래를 하기 위해 울며겨자먹기로 다시 식자재를 배달하고, 손해배상금을 물어낸다.
을남은 식자재 배달을 마치면 일일이 증거로 사진을 찍어둔다. 너무 힘든 일이다. 퇴근이 늦어진다. 하지만, 다시는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도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을남의 마음 속에는 'ㄱ' 업체, 'ㄴ' 업체와 S 사에 대한 분노가 자리잡고 있다. 그 분노는 'ㄱ' 업체, 'ㄴ' 업체와 S 사를 향해 쏟아져야 하겠지만, 되지 않는 싸움이라 단념하고 만다. 정작 그 분노는 엉뚱한 방향을 가리키기 시작한다.
을남은 고객이 되는 상황에서 '갑질'을 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이전에 품고 있던 분노가 '갑질'의 증폭제가 된다. 을남은 내심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나한테 갑질한 적은 없는데' 이런 생각을 품어보기도 하지만, 이미 가속도가 붙은 '갑질'을 회수하기에는 늦었다.
언제부터 관계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갑'과 '을'이 등장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갑'이 되기도 하고 '을'이 되기도 한다. '을'이었을 때, 당한 '갑질'로 인한 분노가 '갑'이 되었을 때 내가 당한 수모와 고통을 더 해 다른 '을'에게 쏟아낸다. 이런 식으로 갑질은 순환한다.
지금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각기 다른 분노에 차 있다. 그리고, '걸리기만 해 봐'라는 심정이 방아쇠처럼 되어 있다. 이런 순환의 과정을 단절시키기는 어렵다. 개인 하나가 참는다고 해서 해결되지도 못 한다.
분노를 삭힐 수 있기를 바랄 뿐이고, 그럴 수 없다면 분노를 제공한 쪽을 향해 그 분노를 쏟아내기를 바랄 뿐이다.